불안에 떨며 긴 밤을 보냈다. 때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든 밤이 찾아왔다. 나는 내게 왜 이런 어둠이 찾아왔는지 알지 못했지만 아직은 더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가끔은 영원히 이 어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 본 찬란한 새벽 빛을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빛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눈부신 새벽 빛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불안의 밤을 가르며 어둠에 묻혀있던 대지를 밝히는 순간을 황홀하게 맞이하려면 나는 더 이상 절망하고 있을 수 없다. 


오늘은 내가 이 세상에 나온 지 30년이 되는 날이다. 지구가 태양을 30바퀴 돌고 다시 같은 자리에 왔다. 나는 그동안 수 많은 새벽을 맞이했다. 수백 수천 번의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을 보았지만 나는 기쁘지 않았다. 나는 황홀하지 않았지만 새벽을 맞이했다. 내 앞에 얼마나 많은 새벽이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숨쉬는 한 더 이상 놓치지 않겠다. 30번째 생일에 쓰는 이 글에서 나는 다짐한다. 앞으로 3가지를 하겠다. 


첫째로 운전하는 직업을 갖겠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원치 않아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나는 혼자 일하는 편이 좋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 온전하다. 지금까지 어떤 일도 1년 이상 지속할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운전이 편하다. 차를 모는 일이 어느정도 적성에도 맞는 것 같고 나만의 공간에서 일할 수 있다. 직업으로써의 운전은 생각과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 가능하면 차를 모는 일을 할 것이고 근무 시간은 최소화할 것이다. 


둘째로 몸과 마음을 보살피겠다. 매일 명상과 운동할 시간을 갖겠다. 나는 아직 내 안에 불안과 우울을 뿌리뽑지 못했다. 여러 시도를 해 보았지고 이제 내가 가야할 길은 명상이라 믿고 있다. 이것이 가장 안전하고 근본적인 해결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뇌는 경험에 따라 구조를 바꾸는데, 이를 신경 가소성이라 부른다. 뇌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약을 먹어도 결국 다시 같은 구멍에 빠진다. 명상은 자기 자신을 믿는 일이다. 나는 나를 믿는다.


셋째로 나머지 모든 시간을 그림을 그리고 블로그를 하는 데 쓰겠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에서 주어진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럴 수 있다면 나도 그 길을 가겠지만 나는 다른 길을 가야한다. 누군가는 불평하지 말고 남들 다 하니까 그냥 하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거의 죽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미 충분히 노력을 해 봤으니, 남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은 없다. 나의 일을 할 때 더 즐겁고 행복한 것을 물론이고 내 능력이 제대로 발휘된다. 온전한 나로서 해야할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이 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에는 이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 내 손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3년 뒤, 5년 뒤, 10년 뒤를 생각하면 지금 이 일을 해야 한다. 더디더라도 5년 뒤를 생각하면 해야한다. 돈을 벌 수단은 결국에는 이 일이 되어야 한다. 나는 자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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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을 분류하는 기준은 종자(보통밀, 스펠트밀, 듀럼밀 등), 파종 시기(겨울밀, 봄밀), 밀알의 색상(붉은 밀, 흰 밀), 조직의 단단하기(경질밀, 연질밀), 생산지(미국 밀, 캐나다 밀 등), 단백질 함량(강력밀, 중력밀, 박력밀) 등이 있습니다. 이 포스트에서는 우리가 집에서 빵을 굽는 데 실제적으로 의미가 있는 기준인 단백질의 함량도정 정도 그리고 품종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미국 밀이건 캐나다 밀이건 이 조건이 비슷한 밀은 비슷한 결과물을 주기 때문입니다.

 

 

 

1. 단백질 함량에 따른 분류


밀은 반죽을 가열할 때 발생하는 가스를 잡아두고 부풀어 빵을 만드는 유일한 곡물입니다. 가스를 잡아두는 반죽의 탄력성은 밀에 포함된 ‘글루텐’이라는 단백질에서 옵니다. 글루텐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 밀일수록 부피가 큰 빵을 만듭니다. 쌀가루를 물로 반죽하면 신축성을 주는 글루텐 단백질이 없기 때문에 늘어나지 않고 툭툭 끊어집니다. 밀가루처럼 가스를 잡아둘 수 없는 것이지요. 단백질의 함량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기 때문에 실용상의 목적으로 밀가루는 3가지로 나누어 씁니다.

<글루텐 단백질에 갇힌 기체들>


1) 박력분 (Cake flour)
단백질 함량: 8~10%
용도: 제과용, 케이크, 쿠키, 비스킷
박력분은 식감이 부드럽고 많은 팽창이 필요하지 않은 케이크나 쿠키를 만드는 데 사용합니다. 적은 단백질로 인해 가스를 잡아둘 탄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빵을 굽는 데 사용하면 빵의 부피가 매우 작아집니다.

2) 중력분 (All-purpose flour, plain flour)
단백질 함량: 9~12%
용도: 제면용, 수제비
설명: 일반적으로 박력분과 강력분 밀가루를 섞어서 만듭니다. 한국에서는 어느 마트에나 중력분 밀가루가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부침개나 수제비를 만들 때 많이 쓰나, 제과나 제빵용으로 대신 사용하기도 합니다. 

3) 강력분 (Bread flour, strong flour)
단백질 함량: 10~13%
용도: 제빵용, 피자
설명: 밀가루의 단백질 함량이 높을수록 반죽의 탄력이 좋아지고 더 많은 가스를 잡아둘 수 있게 되어 빵의 부피가 커집니다. 강력분은 이스트를 사용하여 부피가 크고 쫄깃한 식감의 발효빵을 만드는 데 적합합니다. 

*Note: 박력분이 쿠키의 특성에 더 맞고, 강력분이 빵의 특성에 더 적합하지만, 강력분으로 쿠키를 굽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초코칩 쿠키를 구울 박력분이 집에 없을 때는 당장 중력분이나 강력분을 사용하면 됩니다. 단백질 함량이 높은 밀가루(강력분)로 쿠키를 굽는 경우에는 가능한 반죽을 휘젓거나 치대지 말라고 하는데, 글루텐 형성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 입니다. 강력분을 제과에 이용할 때 빵을 만드는 것처럼 반죽을 하면 쿠키보다는 빵에 가까운 결과물이 나오겠지요.

 

 

2. 도정 정도에 따른 분류


밀의 낟알은 겨라는 내부를 보호하는 질긴 겉 껍질과 나중에 싹이 발아하는 배아, 싹이 자랄 때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하는 배유로 되어 있습니다. 가공하지 않은 상태의 통밀을 그대로 빻아서 쓰면 거친 겨층 때문에 식감이 좋지 않으며, 지방 많이 함유된 배아로 인해 저장성도 떨어지고, 무기질 때문에 제빵성도 떨어집니다. 그래서 보통 배유만 남기고 겨층과 배아를 벗겨버리는 도정 과정을 거친 후 밀가루로 만듭니다. 도정이 잘 되어 겨와 배아가 잘 제거된 밀가루 일수록 높은 등급의 밀가루가 됩니다. 포장지에 1등급 밀가루라고 써져 있는 것은 겨와 배아가 잘 제거되어 회분함량이 0.4% 이하의 밀가루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도정 과정에서 밀은 겨와 배아에 포함된 대부분의 비타민과 식이섬유, 무기질을 잃고 탄수화물 에너지창고인 배유만 남게 됩니다.

<통밀과 정제밀의 차이>


1) 정제 밀가루(Refined flour)
겨층과 배아를 벗겨낸 밀을 빻아서 만든 가루.

장점
- 무기질이 적어 밀가루의 색이 밝고 제품의 색상도 깔끔하게 나오기 때문에 상품에 따라서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 식감이 부드럽고 발효도 더 잘되어 빵의 부피도 커집니다. 
- 구하기 쉽고 가격이 쌉니다.

단점
- 체내에 흡수가 빨라 혈당을 급격히 올립니다.
- 통밀에 비해 미네랄, 식이섬유, 비타민의 손실이 큽니다.


2) 통 밀가루(Whole-wheat flour)
통밀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빻은 가루.

장점 
- 영양적 가치가 흰밀가루에 비해 높습니다.
- 혈당을 비교적 천천히 올립니다.
- 거친 식감이 오히려 씹는 맛이 있습니다.

단점 
- 무기질로 인해 발효력과 팽창력이 떨어집니다.
- 식감과 향이 거칠고 텁텁할 수 있습니다.
- 빵의 색이 어둡습니다.
- 흰밀가루에 상대적으로 비싸고 구하기 힘듭니다.
- 빵이 상대적으로 금방 변질됩니다.

* 일반적으로 통밀가루는 박력분 또는 강력분으로 구분하지 않고 사용합니다. 같은 종자라면 통으로 빻을 때 상대적으로 무기질이 많은 겨와 배아가 들어가기 때문에 동일한 무게의 정제밀과 비교했을 때 단백질 함량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빵을 구울 때 통밀가루를 많이 쓸수록 팽창력이 떨어질 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3. 품종에 따른 분류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밀의 품종들)


오늘날의 밀을 얻기까지 인류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거의 만년 동안 밀의 품종을 계량해 왔습니다. 현대 밀의 조상이 되는 고대의 밀들은 현대밀에 밀려 오랫동안 외면 받았지만 현대밀과는 다른 맛과 영양적 특성으로 시장에서 조금이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밀의 진화>

 

1) 보통계 밀 (Common wheat / Bread wheat) 
세계에서 생산되는 밀의 90%이상을 차지하는 밀로, 우리가 마트에서 구입하는 밀가루의 원료입니다. 에머라는 야생 밀은 기원전 약 9600년 전에 처음 인간에 의해 재배가 시작되어 오랜 세월을 인간의 선택을 거치며 유전적 변이를 겪었습니다. 그 결과 낟알은 더 커지고, 씨앗이 바람에 날려 퍼지지 않고 이삭에 단단히 붙어 있게 되어 씨앗을 수확하기 쉬워졌고, 글루텐 함량이 높아져 빵을 만드는 데도 더 적합해 졌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밀은 씨앗이 이삭에 너무 단단히 붙어있어 식물이 가진 자연적인 씨앗 확산 메커니즘을 상실해버렸기에 야생에서는 생존할 수 없는 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현존하는 품종의 밀 중에는 빵을 만드는 데 가장 적합하기 때문에 영어권에서는 빵 밀(bread wheat)이라고도 불립니다. 빵을 포함해 파스타, 각종 면, 피자, 도넛, 시리얼, 비스킷, 쿠키 등 제과, 제빵, 제면에 모두 쓰이는 팔방미인 입니다. 

<보통계 밀>


2) 스펠트 (Spelt)
스펠트밀은 기원전 6400-6200년에 등장하여 고대 밀 중에는 비교적 현대 밀과 가까운 품종입니다. 청동기와 중세 시대의 주식이었으나 생산성이 떨어지는 등의 이유로 보통계 밀로 대체되어 거의 사라졌다가 최근에 현대의 밀 보다 단백질 함량이 높고 *포드맵(FODMAP) 수치가 낮다는 건강상의 이유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매우 특정한 지역에서만 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보통계 밀 보다 값이 비쌉니다. 현대의 밀처럼 글루텐을 함유하고 있어 제빵에서 현대밀 대신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일반 밀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풍미가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쉽게 구매할 수 있습니다.

<스펠트 밀>


*포드맵(FODMAP): Monash 대학의 소화기 학부에서 만든 용어로, 소장에서 흡수가 잘 되지 않는 짧은 사슬을 가진 4가지 발효성 탄수화물(Fermentable Oligosaccharides, Disaccharides, Monosaccharides, and Polyols)의 앞 글자를 따서 명명했습니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IBS) 환자들은 포드맵을 많이 함유한 식품을 섭취했을 때 복통, 설사, 변비, 가스참 등의 증상이 악화됩니다. Monash 대학 연구팀의 포드맵 분석 결과 스펠트 밀의 포드맵이 보통계 밀 보다 낮다고 합니다. 

<곡류의 FODMAP 함량, 출처: Monash>

*식품의 FODMAP을 확인하고 싶다면 MONASH 대학에서 만든 FODMAP어플(유로)을 이용해보시기 바랍니다.

3) 에머 (Emmer)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에머는 인간이 최초로 경작하기 시작한 밀입니다. 고대 시기에는 널리 경작되었으나 현재는 유라시아 산악지형에서만 일부 재배되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이탈리아 에서만 파로(Farro)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빵이나 수프로 즐겨먹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빵을 구울 때나 듀럼 밀처럼 파스타를 만들 때도 씁니다. 에머 밀은 단백질 함량이 높고 글루텐 함량이 낮아 글루텐에 민감한 사람들이게 좋다고 여겨집니다. 스펠트 밀 보다 풍부하고 깊은 달콤 고소한 풍미가 있다고 합니다.

<에머 밀>

 

4) 듀럼 (Durum) 
에머와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밀 품종으로 현재 보통 밀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생산되는 밀 품종입니다. 그래봐야 전체 밀 생산량의 8% 이하에 불과할 정도로 보통밀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듀럼밀은 기원전 7000년 경에 에머 밀을 인공적으로 품종 계량하여 개발된 종입니다. 듀럼밀은 모든 밀 중에 가장 단단하여 제분하기가 매우 까다롭고 회분이 많이 함유되어 박력분에 가까운 밀가루가 됩니다. 따라서 강한 글루텐 형성이 요구되는 빵 보다는 파스타를 만드는 데 많이 사용됩니다. 듀럼 밀만으로 빵을 굽게 되면 기공이 적고 부피가 작으며 탄력이 약한 빵이 됩니다.

 

5) 아인콘 (Einkorn)
가장 오래된 밀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는 품종입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에 의해 경작되었고 현재에는 유럽과 아시아의 서남부 지역에서만 일부 경작되고 있습니다. 아인콘 밀은 다른 품종에 비해 산출량이 낮지만 다른 밀이 생존할 수 없는 척박한 토양에서도 자랍니다. 알맹이는 매우 작고 현미처럼 생겼습니다. 아인콘 만의 독특한 고소한 풍미가 있으며 현대 밀 보다 특정 무기질과 비타민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영양가가 더 높다고 합니다. 글루텐을 함유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현대 밀 대용으로 쓸 수 있지만 팽창력이 부족하여 빵의 부피가 작습니다.

<아인콘 밀>


6) 호라산 (카무트) Khorasan (Kamut)
호라산은 고대 지명을 따 이름 지어졌습니다. 가끔은 상표명인 카무트라고 불리기도 하며 지금은 세계적으로 매우 적은 양이 생산됩니다. 알맹이가 현대 밀의 두 배 정도 되며 현대 밀 보다 많은 단백질과 비타민 E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대 밀 대용으로 제과나 제빵에 사용할 수 있으며 식감이 부드럽고 고소한 풍미가 있다고 합니다.

<호라산 밀>

이 질문을 받을 때 나는

“글쎄요… 일단 뭐라도 해서 돈을 좀 모으려 고요.”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은 거지 같은 대답이다.

진짜 대답은 “사람이 없는 예쁜 모래사장이 있는 바닷가에 땅을 살 겁니다. 


그곳에 통나무 집을 짓고 가능한 자급자족하며 살 겁니다. 


그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활을 쏘고 농사를 짓고 명상을 하며 살고 싶어요. 


이 4가지는 저의 일생에 거쳐서 숨이 붙어있는 한 하려고 해요.


각 분야를 깊이 실험하고 연구해서 저만의 정립된 체계를 만들어 보려고 해요. 


예술과 자연 외에 제가 관심 있는 게 이 세상에는 딱히 없거든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바란다면, 그 여정을 함께할 동반자가 있다면 더 좋겠군요. 


하지만 혼자 여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때로는 외롭겠지만…


의미 없는 사람들 속에 둘려 쌓여 사는 건 더 외롭거든요.”이다. 

 

 


내가 이렇게 대답하지 않고 둘러대는 이유는 피곤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꿈에 대해 말할 때는 직업적인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나의 대답은 이목을 끈다.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관념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속내를 밝히지 않게 되었다.


이질감만 커질 뿐이다.


돈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돈을 구하는 과정도 수단을 얻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수단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다음 질문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돈이 필요한 만큼 있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건가요?”

 

 


돈이 무한해도 하고 싶은 게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괜찮은 결론이다.


그냥 죽는 날까지 적당히 살아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원하는 것이 돈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은 상상 속에서 이루어야 한다. 


나에게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현실은 한계적이다.


그럼에도 내가 사는 현실 속에서 가능한 이상에 가깝게 가고자 노력할 뿐이다.

 

 

 

구체적인 대답을 얻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어느 날 빈 캔버스와 물감이 주어졌다.


캔버스에 이런 저런 밑그림을 그렸다 지우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수년에 걸쳐 큰 그림이 잡히기 시작하고 세부적인 것들을 채워 나간다.


어느 순간부터 그림의 전체적인 형태와 분위기는 거의 바뀌지 않는다.


이제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명확히 안다.


앞으로도 국소적인 변화가 있겠지만 이 정도면 그림은 완성되었다.


모든 것은 탐구를 하며 내면을 관찰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소비한 에너지와 시간은 상당했던 것 같다.


남들이 사회생활에 전념하는 동안 나는 이런 것들에 몰두했다. 


세상에서는 낭비한 시간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삶의 가치가 다른 사람들처럼 사회에 있었다면 나도 그런 인생을 살았겠지만,


내 삶의 가치는 그곳에 없다.


이것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내가 어디를 향해 가야하는지 알고 있다는 정도다.


정글 한 복판에 떨어지든, 사막 한 가운데 고립되든, 가야할 방향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루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오늘도, 내일도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색의 물감을 원하는 만큼 쓸 수 있다면, 캔버스에 무엇을 그릴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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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에는 결정적 시기 가설(critical period hypothesis)이라는 것이 있다. 

 

결정적 시기는 생명체의 발달 단계에서 신경계가 외부 자극에 특히 민감한 기간을 가리킨다. 

 

모국어 습득에 있어서는 5세에서 사춘기 까지가 결정적 시기라고 여겨진다. 

 

이 기간에 모국어에 대한 적절한 자극(교육)을 받지 못하면 그 이후에 아무리 강한 자극을 주어도 완전한 언어구사력을 습득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아주 어렸을 때 야생에 고립되어 동물들에 의해 키워진 아이들(feral children)의 예를 보면 대부분이 인간의 사회로 복귀한 후에도 평생 동안 언어습득에 어려움을 보이며 동물의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A Lion Attacking a Stag, George Stubbs ,1765-1766

 

이 이론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여기서 언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 이론의 진위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언어가 인간에게, 그리고 나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 이다.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근본적인 차이를 이성이라고 한다. 

 

이성이란 개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다. 개념이란 대상을 구체화한 것이다. 

 

구체화란 추상화와 반대되는 것으로 형태를 갖게 하여 지각할 수 있게 한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대상이든 보이지 않는 대상이든 머릿속에서 구체화할 수 있다. 

 

그 구체화는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어떠한 대상을 머릿속에서 언어라는 형태로 구체화하여 생각하는 능력이 이성이며 구체화한 여러 대상들의 관계를 따지는 것이 논리다. 

 

논리와 이성적인 사고는 모두 언어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언어라는 수단이 없는 동물은 대상을 구체화하여 저장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논리적인 사고에 한계가 있다. 

 

그들은 추상 속에 살고있다.

 

 

Composition-VII, Wassily Kandinsky, 1913


인간의 문명 자체가 언어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집이다. 

 

언어가 사회적인 측면에서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 같다. 

 

첫째는 논리적인 사고로 체계를 새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이고 나머지는 후대에 지식을 전하는 전령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논리를 바탕으로 체계적인 이론과 제도를 만들고 그 체계를 한 세대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구전으로 전하여 또는 글로 기록하여 다음 세대로 전수하고 이어받아 발전시키게 한다. 

 

우리는 그것을 문명이라 부른다.

 

 

Seaport with the Embarkation of the Queen of Sheba, Claude, 1648

나는 언젠가 사람들로 가득한 이 도시를 벗어나 혼자 살아가려고 한다. 

 

여태껏 한 번도 이곳이 내가 있을 곳이라 생각한 적이 없다. 

 

인간들의 사회는 지금까지 나에게 상실과 실망, 이질감을 주었다. 

 

그곳에서 시작된 불안이 이제는 습관처럼 하나의 감정으로 자리잡았다. 

 

그들이 내게 가르쳐 준 관습과 형식, 방식, 태도는 마지막 한 톨까지 모조리 나의 세계에서 털어 버려야 불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야만 내가 온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정말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사람들은 지금까지 나를 키워주고, 말하고 쓰는 법을 가르쳐 주고, 숟가락과 젓가락 쓰는 법을 알려주고, 과학과 역사를 가르쳐 주고, 컴퓨터 쓰는 법과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 모든 것들을 내놓고 나면 나에게서 무엇이 남는가? 

 

여태 그들의 조력 없이 오직 나의 힘으로 해낸 것이 무엇인가? 

 

무엇보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득한 세월 동안 발전시켜 온 인간 고유의 특성인 언어를 나에게 주었다. 

 

그래서 나는 한 인간이 되었다. 

 

나는 그들이 준 언어로 생각하고 분별한다. 

 

그들의 언어로 나의 문명이라 할 수 있는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와 나의 예술에서 그들의 소산인 언어를 뿌리뽑을 수 있는가? 

 

머릿속에 일어나는 사소한 한 생각에서 조차 그들의 소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내가 만일 문명에서 고립되어 침팬지들에 의해 길러졌다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인지와 사고를 소유하고 있을까? 

 

침팬지의 아이인 나는 과연 노을 그림을 보고 지금처럼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을까? 

 

천둥이 치고 폭풍우가 몰려오는 밤에는 여전히 비장함을 느낄 것인가? 

 

언어와 감정은 다른 것이니 여전히 그렇게 느낄 것인가? 

 

아닐 것이다. 

 

섬세한 감정들 또한 문화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을 것이다. 

 

침패지는 노을 그림의 가치를 모를 것이다. 그들에게 노을 그림은 새 똥이 묻은 나뭇잎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A Country Home, Frederic Edwin Church, 1854

 

인간을 규정하는 자질의 바탕이 언어에 있기 때문에 언어를 나에게서 뿌리뽑지 못한다면 결국 나는 인간들에게 종속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나라는 존재의 정신 작용을 이루고 있는 것이 언어이므로 언어를 나에게서 뿌리뽑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20년 동안 부모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자란 아이가 여태껏 필요한 모든 것들은 자력으로 익힌 것이며 이제 혼자 살 수 있으니 더 이상 인생에 참견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배은망덕하고 자기의 분수를 모르는 말일 것이다.

 

 

 


지금까지 인간과 언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이유는 나의 예술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한계성을 인정하기 위해서였다. 

 

나만의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처음으로 할 일은 내가 인정할 수 없는 사람들과 그들이 이루고 있는 사회에서 얻은 것들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그들에게 받은 것이고 어디까지가 온전히 내가 터득한 것인지 생각을 해보니 그 뿌리가 언어에 있었고, 언어는 나와 불가분한 요소라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따라서 고립되어 혼자 예술을 창조한다 하여도 인간들을 내 예술에서 근절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나는 그 사실을 것을 인정한다. 

 

 

 


덧붙여, 사회를 역행하는 나의 성향 또한 사회적 경험들로부터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결국 나라는 존재 전부가 사회적 산물 그 자체인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내가 취할 수 있는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아집을 버리고 내 예술에 그들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일까? 

 

하지만 이론과 현실이 항상 타협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의식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든 무의식 속에 박힌 내 성향은 변하기 매우 힘든 것이다. 

 

그들이 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을 그릴 수는 없다. 

 

나의 성향을 거스르는 것은 매우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치 않는 것도 원수의 것이고 원하는 것도 원수의 것이라면 선택은 명확해 진다.

 

 

 Wheatfield with crows, Vincent van Gogh, 1890

기질상 나의 지향성은 함께 있음을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성에 반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함께 있음에서 오는 불안으로부터 홀로 온전하기를 바라는 누군가가 있다면 내 말을 이해할 지도 모르겠다. 

 

내가 예술에서 추구하는 것은 지속가능성과, 자급자족이다. 

 

이 두 가지 요건은 인과관계에 있기 때문에 사실상 같은 의미로 봐야 한다.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자급자족해야 하며, 자급자족하면 지속이 가능하다. 

 

여기서 말하는 자급자족이란 다른 인간을 제외한 나와 자연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부모가 있는 집에서 나와 독립한 채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자급자족의 의미와는 다르다. 

 

사회에서의 자급자족은 내 시각에서는 지속가능한 상태가 아니다. 

 

 

 


그 이유는 내가 인간의 속성을 ‘변화’로, 자연의 속성을 ‘순환’으로 보기 때문이다. 

 

인간은 알 수 없는 끝을 향해 정처 없이 나아가는 존재다. 

 

자연은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끊임없이 순환하는 세계다.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할 것 같은 지구도, 태양도 조금씩 변하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최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직진성은 자연의 것과는 비교 할 수 없이 거세다. 

 

끊임없이 표류하는 인간들에게 의지한 채 살아가는 삶의 형태가 나에게는 불안 요소가 된다. 

 

변화 자체를 내 세계에서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변화무쌍한 세계라도 전체를 아우르는 순환 체계가 있어야 한다. 

 

변화가 있는 세계는 흥미롭지만 불안을 내포하고 있으며 변화가 없는 세계는 안정적이지만 따분하다. 

 

이 두가지를 모두 내포한 개념이 순환이다. 

 

그래서 내 예술의 관찰 대상은 자연이며 나와 자연 사이에 다른 인간을 배제한다. 

 

 

상형문자

위쪽의 그림은 내가 임의로 만든 상형문자다.

 

사물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문자를 상형문자라 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식적인 문명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대부분 이해할 것이다. 

관동별곡, 정철, 1580


위의 글은 1580년 강원도 관찰사에 부임한 정철이라는 사람이 강원도 여행을 하고 느낀 자신의 소감을 노래한 관동별곡이라는 가사의 일부다.

 

440년 전에 쓰인 글을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바꿔 말하면 지금 나의 이 글을 500년 후의 한국인들은 해석 없이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해석을 통해 이해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원문의 미묘한 어감과 말투를 온전히 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도 변하기 마련이다.

 

언어의 일시성 때문에 어느 시점이 되면 한 개인이 독자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즉, 언어는 어느 순간 자급자족할 수 없는 수단이 된다.

 

상형문자는 한 인간이 자연에서 얻는 보편적인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 들어간다.

 

하지만 관동별곡의 경우 해당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시대에서는 자연을 아무리 오랫동안 관찰한다 해도 혼자서는 이해할 수 없다.

 

지금 이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와 자연 이외에 변화하는 외부 세계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곳은 끝없이 쇄도하는, 언제 곤두박질칠지 모르는 세계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강원도의 절경을 글이 아닌 그림이나 사진 또는 음악으로 남겨놓았다면 수천년이 지나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누군가의 이해를 바란다는 말은 그 자체로 자급자족에 모순되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

 

나 이외의 누군가에게 기대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예술을 이해하는 대상을 나는 남이 아닌 나 자신으로 본다.

 

내가 사고로 기억을 잃은 채 냉동 인간이 되어 수 천, 수 만년 뒤에 깨어난다고 해도 상식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면 그 시대에서 내 그림을 보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기를 바란다.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Caspar David Friedrich, 1818

 

내 예술적 성향은 18세기 예술 사조인 낭만주의의 전형이다. 

 

낭만주의란 어떤 대상에서 낭만을 추구한다는 것인데, 낭만이란 감정의 극단이다. 

 

즉, 관찰의 대상에서 극단의 깊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낭만주의자에게 새벽은 단순히 불덩이가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때가 아니다. 

 

밤과 낮 사이를 가르며 새어 나오는 태양빛을 보며 어릿할 정도의 황홀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내 극적인 성향은 거기에서 온다고 본다. 

 

나는 가볍게 하지 않는다. 

 

한 발의 화살을 날리더라도 내 모든 것을 담아서 쏜다.

 

 

 


앞서 이야기한 내용과 종합해보면, 내 예술의 대상은 자연이며, 그 표현과 의미가 강렬하고 깊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자연관찰을 통해 독자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깊이가 있어야 한다. 

 

예술의 깊이에 대해서는 계속 생각하는 과정에 있으나 지금까지 이른 결론은 예술에서 깊이를 추구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라는 것이다. 

 

뻔하지 않은 것에서 오는 오묘함에 대한 깊이와 일반적인 대상의 깊은 탐구에서 오는 깊이다.

 

 

La Table Garnie, Henri Fantin-Latour, 1866

 

위 그림은 19세기 프랑스 화가인 헨리 팡탱 라투르가 그린 정물화다. 

 

그는 사실적인 꽃 정물화를 많이 그렸다. 

 

그의 그림이 보기에 난해하거나 오묘한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현실적인 묘사가 오히려 사진처럼 뻔하고 개성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그림에 깊이가 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흔하디 흔한 꽃과 과일이지만 화가 자신이 이 대상들로부터 깊은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면 평생을 이런 꽃 그림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화가는 원하는 구도를 찾기 위해 꽃과 과일을 이리저리 옮기며 얼마나 오랜 시간 탁자 주위를 맴돌았을까? 

 

얼마나 오랜 시간 붓을 들고 이젤 앞에 서 있었을까? 

 

완성된 그림을 보고 화가는 얼마나 깊은 행복을 느꼈을까?
 

 

Straw-trimmed vase sugar bowl and apples, Paul Cezanne, 1890-1893

 

이 그림은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폴세잔의 사과 정물화다. 

 

그의 그림이 미술사에서 가지고 있는 의의는 조금 과장해서 비유하자면 수렵 채집을 하던 인류가 ‘농사’짓는 법을 배운 뒤 삶의 행태가 바뀐 것과 같다. 

 

그는 현대 미술의 선두에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 그림을 처음 보고 유화를 막 배우기 시작한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의 습작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폴세잔의 정물화는 미술사적 가치에서 보자면 팡탱 라투르의 정물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전까지 회화에는 색, 형태, 원근 등의 깰 수 없는 암묵적 관습이 있었다. 

 

세잔은 수 세기 동안 지켜온 오랜 형식을 최초로 깬 사람이다. 

 

 

 


나는 미술사에 대해 공부를 한 후에도 이 그림이 여전히 순수하지 않으며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림 자체만으로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있어야 하는데, 이 그림의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그림 외적인 지식인 미술사에 대한 지식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다시 생각해보니, 이 그림은 지극히 순수하고 자연적이며 자급자족적이었다. 

 

이 그림이 가치 있는 이유는 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평범하고 뻔한 것에 실증이 느낀다. 

 

매일 똑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똑 같은 길을 걷고 똑같은 하늘을 보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시간에 잔다. 

 

이 생활은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따분하다. 

 

어느 날은 하늘을 보며 세찬 소나기가 쏟아지기를 바란다. 

 

어느 날은 매운 음식이 먹고 싶고 어느 날은 아직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가보고 싶은 법이다. 

 

세잔이라는 사람이 없었더라도 언젠가는 따분한 형식이 깨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흐름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과를 수 백, 수 천 번 그리다 보면 언젠가 한 번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물감을 덕지덕지 바르고 원근을 무시한 노란색 사과를 그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세잔의 사과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Still Life with Bible, Vincent Van Gogh, 1885

 

하지만 아무리 뻔하지 않은 것이 매력적이고 오묘하다 해도 앞서 설명한 이유 때문에 문자에는 한계가 있다. 

 

언어도 인간의 필요에 따라 자연적으로 발달하였지만 단순히 독특한 것을 넘어서 체계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시간이 무한하다해도 개인이 관찰과 경험으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내가 허용할 수 있는 문자는 상형문자 정도인데, 상형문자는 추상에 가까우므로 직관적인 이해는 쉬워도 고차원적이고 복잡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기에는 매우 제한적이다. 

 

만일 현대의 언어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자급자족을 만족하는 형태로 바꿔야 한다. 

 

예를 들어 한글을 사용하고자 한다면, 혼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에 대한 매뉴얼을 만들어 놓으면 자급자족할 수 있는 형태가 된다. 

 

그러면 언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더라도 매뉴얼로 당시의 예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매뉴얼은 물론 자급자족한 수단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하지만 한글의 쓰임 체계가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해당되는 모든 음소, 단어, 문법 체계를 단순한 상형문자 같은 수단으로 설명하는 것은 사실상 힘들다고 본다. 

 

 

 


어떤 예술을 추구하든, 내 모든 예술 작품에는 반드시 설명을 덧붙여 놓을 생각이다.

 

뻔한 팡탱 라투르의 정물화든, 난해한 세잔의 정물화든 어떤 점에서 감동이 있고 의미가 있는지 부연설명을 달아 놓을 것이다.

 

아무 의미가 없는 그림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말이라도 써 놓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예술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한글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고차원적인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현대 언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차원적인 깊이를 추구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성향으로 인해 문자 자체를 포기하기는 힘들 것 같다.


예술에 대한 체계가 정립되어 나가면서 새로운 방향이 생길 것으로 본다.

 

 

 


지금까지의 모든 내용을 정리하자면 나는 한 인간으로서 내가 독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인간의 특성을 규정하는 뿌리뽑을 수 없는 성질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 한계성을 인정한 위에서, 그들에게 받은 것을 이용해 나만의 것을 창조한다는 모순 위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그들의 것을 배제하고 나만의 예술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그러기 위한 조건은 예술이 나와 자연 사이에서 온전히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인 자급자족을 만족해야 하며, 극단적인 나의 성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감동을 줄 만큼 깊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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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지금까지 겪었던 나를 괴롭히는 4가지 정신적 현상에 대해 쓰려고 한다.

현재 진행 중인 것도 있고 사라진 것도 있다.

이번에는 그 중에 하나인 강박적 사고와 그에 수반하는 감정에 대한 것이다.

강박적 사고가 사람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수렁에서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나의 경험을 밑그림 삼아 써놓았다.

이 정신 현상에 대한 의학적인 용어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감정의 늪이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생각에서 시작되나 종국에 가서는 헤어나오기 힘든 감정으로 자리 잡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문제를 명확히 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마음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이다.

그럴 경우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강박적 사고로 고통받는 환자를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나 상담가가 이 글을 읽는다면 환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감정의 늪


이 현상은 두 개 이상의 선택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유발된다.

보통은 두 개 중에 고민하는 경우가 많았다.

둘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유는 둘다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둘 다 맘에 안 들거나 하나가 오로지 단점만 있다면 선택에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두 개가 비슷하게 좋은 경우다.

이 경우 논리적인 해결책은 둘 다 갖거나, 반드시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과감히 하나를 버리는 것이다.

먼저, 전자는 나에게 문제가 된다.

하나만 선택하고자 하는 나의 극단적인 성향 때문이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궁극적인 하나를 찾는다.

“필요한 거 하나만 있으면 된다.”가 나의 가치관 이었다.

비슷한 선택지 중에서도 결국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과감히 버릴 수 있느냐?

그것도 나에게는 어렵다.

두 개를 놓고 고민하는 상황 자체가 완벽한 하나가 없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기 때문에 선택의 문턱을 넘어도 첫 번째 이유에 다시 발목이 잡힌다.

즉, 집착적인 성향 때문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온전한 선택이 아니기 때문에 회의가 찾아온다.

선택을 해도 문제이고 안 해도 문제인 혼돈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이 궁지에 빠지는 과정은 이렇다.

고민이 시작되면 둘 중 하나를 고르기 위해 두 선택지를 저울질 한다.

논리적으로 둘의 득실을 비교한다.

그 과정에서 이쪽으로 기울었다가 저쪽으로 기울었다가 갈팡질팡 한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천 번도 넘게 강물을 건너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어찌되었든 하나를 택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내 생각에 그나마 나은 하나를 고르게 된다.

그러면 이제 생각의 고뇌가 끝나는가?

이상적이지 않을 뿐 둘 중에 나에게 현실적으로 더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니 이제 선택에서 자유로운 것인가?

불행히도 이 정도가 되면 이미 늦었다.

생각에 관성이 생겨서 생각을 멈출 수가 없게 된다.

내릴 수 없는 시소에 탄 상황이 된다.

머리속에서는 이 선택이 정말 옳은 것이었는지 의문을 던지고 둘을 비교하던 그 장소로 다시 나를 데려다 놓는다.

생각을 번복해서 다른 하나를 선택한다 해도 여전히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절벽으로 내달리는 미친 말 위에 탄 것을 알지만 내릴 수 없다.

빠져나오려 발버둥칠수록 생각의 늪에 깊이 빠진다.

한 가지 문제가 더 있다.

단지 생각이 반복되는 것이라면 에너지가 소모될 뿐이다.

생각은 감정을 동반한다.

맑은 여름 하늘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처음 두 선택지를 비교할 때의 감정은 ‘들뜬 느낌’에 가깝다.

둘 사이를 셀 수 없이 오락가락하는 강박 속에서 감정은 ‘혼란’으로 바뀐다.

강을 건너면 떠난 자리가 생각나고 다시 돌아오면 건너 자리가 그리운 상황이 반복되니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혼란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부터는 해당되는 생각을 할 때마다 혼란이 같이 올라온다.

비교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으니 매번 혼란의 감정도 덤으로 받아야 한다.

생각과 감정은 계속 중첩이 되어 되풀이 할수록 그 세기가 강해진다.

종국에는 자아가 분열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상황에서도 생각은 자살기계처럼 계속 돌아간다.

한 생각에 사로잡힌 대가는 이렇다.

 


이 괴로움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다음을 생각해봐야 한다.

뿌리를 쫓아 내려다가 보면 미니멀리즘의 본질에 닿게 된다.

그 시작은 완벽한 하나를 소유하고자 하는 한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궁극적으로 필요한 한 가지만 소유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인가?

그것은 가능한 상태인 것인가?

필요한 하나의 궁극을 가졌다는 것은 누가 아는가?

내면을 잘 관찰해보면 그 판단의 기준은 감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판단은 이성이 하지만 필요의 욕구를 일으키는 것은 감정이다.

원하고 바라고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감정이다.

밥을 먹을 때 밥그릇 하나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좋다.

숟가락은 어떤가? 반드시 필요한가?

손으로 먹으면 되지 않는가?

식사할 때 숟가락을 쓴다면 정말 궁극적으로 필요한 하나만 추구한다고 할 수 있는가?

궁극적인 하나에 대한 필요의 경계는 누가 정하는가?

감정의 잣대로 정해진다.

감정은 변덕스럽다.

감정의 변덕으로는 명확한 경계를 만들 수 없다.

어제는 숟가락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고 오늘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감정이 진짜인가?

둘 모두 진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선택 사이에서 뚜렷한 경계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미니멀리즘은 주관적인 것이다.

절대적인 미니멀리즘은 없다.

더 나아가면 소위 미니멀리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최소를 추구한다면 그 종착지는 어떤 것도 없는 무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 외의 상태는 엄밀히 말하면 최소의 상태가 아니다.

무의 상태가 아닌 최소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모순의 수렁에 빠뜨리는 일이다.

원하는 감정이 크지 않은 사람에게도 선택은 여전히 어려운 고민일 것이다.

하지만 괴롭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감정이 강한 사람이다.

꽃 향기에 나는 발길을 멈출 수 밖에 없다.

꽃 향기 따위가 나에게 일으키는 감정의 요동은 너무나 강하다.

나의 성향으로 인해 이 괴로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와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비슷한 아픔을 겪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이 나락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에 대해 쓰려고 한다.

수도 없이 같은 구멍에 빠지다 보니 요령이 생겨 현재는 수렁에 잘 빠지지 않게 되었다.

낌새가 이상하면 내가 즉시 발을 빼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빠져도 전보다는 쉽게 나온다.

하지만 나의 극단적인 기질로 인해 언제라도 다시 빠질 수 있으며 의식적으로 정신의 고삐를 잡지 않으면 아주 깊이 빠질 것이다.

구덩이에 빠졌을 때, 알아야 할 것과 해야할 것이 있다.

알아야 할 것은 ‘궁극적이고 완벽한 하나를 가진 절대적인 상태는 처음부터 불가능 하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내 바람대로 만들었다면 이런 모양새는 아닐 것이다.

검은 예리하지만 부드러움이 없다.

솜은 부드럽지만 예리함은 없다.

검의 예리함과 솜의 부드러움을 모두 갖는 이상적인 무엇인가는 존재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하나만 가지려면 둘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하는데, 그 선택의 기준은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베는 상황에서는 검이 필요하고 또 다른 의미의 베는 상황에서는 솜이 필요하다.

감정에 따라 오늘은 검의 예리함을, 내일은 솜의 부드러움을 원할 것이다.

둘 사에서 고민하는 상황이 둘 모두를 필요로 하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선택에 대한 고민은 무의미한 것이다.

애초에 완벽한 하나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완벽하다는 기준도 가변적이다.

‘완벽한 하나’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며 생각의 늪으로 빠지는 길이다.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그 생각에 대한 답이 애초에 없다는 것을 먼저 인지한다.

어차피 모든 선택이 불완전 하니, 어떤 선택을 하든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을 선택하든, 저것을 선택하든, 선택을 하든, 안 하든 어차피 완벽한 것은 없다.

이 세상 자체가 내게는 불완전한데 어쩌겠는가?

내 마음 또한 불변하는 것이 아닌데 어쩌겠는가?

불완전한 세상과 내 자신을 인정할 수 없다면 죽는 수밖에 없다.

그게 아니라면 적당한 것을 선택하고 살아가야 한다.

바보처럼 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불행하게 사는 것이다.

그것도 안 된다면 혼란의 감정이 사라질 때까지 선택을 보류한다.

미쳐있는 상태에서 온전한 분별력이 있을 리가 없다.

 

그 다음 해야할 일은 주의를 돌리는 것이다.

뇌는 생각을 하고 느끼는 방향으로 계속 강화된다.

뇌 속의 해당 회로가 너무 강해졌으니 다시 약화시켜야 한다.

방법은 회로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뇌의 시냅스 회로는 사용하지 않으면 약해진다.

회로는 강화될수록 빠져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더 이상 그 방향으로 시냅스 회로를 강화하지 말아야 한다.

생각이 그쪽으로 빠질 때마다 가능한 빠르게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

말은 쉽지만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머리 속에서는 여기서 나가야겠다는 생각과 분석을 계속하면 분명 더 나은 답이 있을 것 같다는 강박이 계속해서 충돌한다.

그 속에서도 주위를 돌리기 위한 뭔가를 계속 해야한다.

파괴적이거나 자학적이지 않은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해야한다.

충격이 강할수록 빠져나오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우연히 병원에 갔다가 말기 암 진단을 받아 3개월 뒤에 죽는다는 선고를 받는다면 강박에서 즉시 자유로워질 것이다.

강박이 아무리 심해도 생존에 대한 본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그 정도의 충격을 받기는 어렵기 때문에 즉시 빠져나오는 것은 힘들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록 조금씩 강박에서 멀어진다.

당분간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

바쁘게 몸을 움직이거나 사람들과 봉사를 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정신없이 머리 쓰는 일을 하거나 계속 명상을 한다.

생각이 새어나갈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모래 위에 파인 발자국이 파도에 씻겨 나가듯 나를 옥죄던 강박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그런 길은 없다
아무리 어둔 길이라도
나 이전에
누군가는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고,
아무리 가파른 길이라도
나 이전에
누군가는 이 길을 통과했을 것이다.
아무도 걸어가 본 적이 없는
그런 길은 없다.
나의 어두운 시기가
비슷한 여행을 하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베드로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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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줄리엣이 했던 말처럼 빵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해도 그 달콤한 맛과 향은 변함이 없을 테니까요.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 밀가루와 물, 소금, 그리고 약간의 수고만 있다면 쫄깃한 빵을 구워먹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빵이라는 것은 밀가루에 물, 소금을 넣고 한 데 뭉쳐지도록 반죽을 한 뒤 열을 가해 익힌 요리입니다.

 

이것이 빵의 본질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구워진 빵은 벽돌처럼 단단한 빵이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폭신하고 쫄깃한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 가지 재료가 더 필요합니다.

 

바로 이스트(효모)입니다.

 

이스트라는 친구는 미생물입니다.

 

크기가 보통 5~8 마이크로미터쯤 되기 때문에 맨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제빵에서 이스트의 가장 큰 역할은 빵을 부풀게 하여 폭신한 식감을 주는 것입니다.

 

탄수화물을 좋아하는 것은 사람뿐 아니라 이스트도 마찬가지 입니다.

 

반죽에 이스트를 넣으면 이스트는 밀가루에 있는 탄수화물을 먹고 이산화탄소와 다른 부산물들을 배출합니다.

 

그 부산물들이 빵에 빵 다운 맛과 향, 질감을 줍니다.

 

이스트는 공기 중에도 있고 곡식, 과일, 채소 등 거의 모든 곳에 존재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눈에보이지 않기 때문에 손으로 잡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스트가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이스트 친구들이 이사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스트 친구들이 일단 정착을 하게 되면 우리가 저버리지 않는 한 그들은 제빵 인생의 영원한 동반자가 됩니다.

 

 

 

이스트를 잡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다면 동네 마트에서 건조된 상태로 판매되는 상업용 이스트를 구입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직접 수고를 들여 자연적으로 포획한 천연효모와 상업용효모는 차이가 있습니다.

 

천연효모는 효모 한 종류의 미생물이 아닌 효모를 포함한 수많은 미생물들의 복합체입니다.

 

그 안에는 효모와 유산균들, 젖산균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다양한 미생물들이 발효의 과정에서 알코올, 초산, 젖산 등의 부산물을 내놓아 빵에 복합적인 시큼한(Sour) 풍미를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연효모로 발효시켜 구운 빵을 사워도우(Sourdough)라 부릅니다.

 

반면에 마트에서 구매하는 상업용효모는 천연효모에서 순수한 효모만 추출, 배양하여 건조시킨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맛이 적어 단백한 맛이 나고 발효력이 천연효모 보다 좋습니다.

 

또한 매번 빵 구울 시간에 맞추어 밥을 줘야하는 천연효모에 비해 보관과 사용도 편리합니다.

 

그럼에도 사워도우(천연효모 빵)를 먹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워도우 빵은 노화가 느리고, 독특한 깊은 맛이 있으며, 발효 시간이 길어 소화가 잘 되는 등의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가장 큰 장점은 사워도우 빵의 낮은 GI(소위 GI지수=혈당지수=당지수) 입니다.

 

GI란 탄수화물이 들어있는 식품을 섭취 한 뒤 순수한 포도당을 섭취했을 때와 비교하여 혈당(혈액 속의 포도당 농도)을 올리는 정도를 0 ~ 100 사이의 숫자로 나타낸 수치입니다.

 

어떤 음식의 GI100이라는 말은 동일한 양의 포도당을 섭취했을 때와 같은 정도로 혈당 수치를 올린다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GI70 이상인 식품을 GI가 높은 식품으로 보고 피하도록 권장합니다.

 

아래에 우리가 주로 먹는 음식들의 GI를 정리해 봤습니다.

 

 

GI가 높은 음식을 피하라고 권하는 이유는 혈당을 급격하게 올리는 행위가 몸에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혈당이 오르게 되면 몸은 긴급한 상태로 인식하고 이자에서 인슐린을 분비합니다.

 

인슐린은 혈액 속의 포도당을 근육, 간 등의 세포로 보내서 당이나 지방의 형태로 저장합니다.

 

건강한 상태에서 이자는 자신의 일을 열심히 수행하지만 지속적으로 높은 혈당의 혹사를 당하게 되면 결국에는 에너지가 고갈되어 일을 포기해 버립니다.

 

그 상황이 되면 혈당이 높은 상태에서도 지친 이자는 인슐린을 만들어낼 힘이 없습니다.

 

이 상태를 제2형 당뇨병이라 부릅니다.

 

혈당은 당뇨병 뿐 아니라 심장 질환, 비만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낮은 GI 식품을 섭취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근거는 http://www.glycemicindex.com/about.php 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천연효모로 빵을 만들 때는 그 특성상 상업용효모를 썼을 때보다 발효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만드는 방식은 천차만별이지만 일반적으로 사워도우는 저온(5도 정도)에서 하루 정도를, 길게는 이틀을 발효시킵니다.

 

발효는 이스트가 밀가루의 탄수화물을 분해시키고 부산물을 만드는 과정이므로 발효 시간이 길수록 많은 탄수화물이 분해되고 많은 부산물이 생성됩니다.

 

인간이 소화시켜야 할 탄수화물을 이스트가 대신 해주기 때문에 우리에게 흡수되는 탄수화물이 적어지고 자연히 GI도 낮아지게 되는 것이지요.

 

아래는 Glycemicindex.com(혈당지수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공동 제안하여 만든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천연효모로 만든 사워도우와 상업용효모로 만든 일반 빵의 GI입니다.

 

 

 

실험에 사용한 사워도우가 어떤 발효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사워도우가 이와 같은 GI를 가졌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단시간 발효로 만들어지는 흰 빵 보다 GI가 낮은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발효를 오래 시킬수록 GI가 낮아지고 소화가 잘 되므로 맛이 나빠지지 않는 선에서 발효를 최대한 오래 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사워도우 빵의 또 한가지 장점은 낮은 포드맵(FODMAP)입니다.

 

포드맵은 탄수화물의 일종입니다.

 

탄수화물은 우리 몸이 가장 먼저 에너지로 사용하는 물질입니다. 


따라서 생존에 매우 직결되기 때문에 인간의 뇌는 탄수화물을 갈망합니다.


탄수화물은 보통 결합한 당의 개수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합니다.

 

이 중에 4가지 발효되는 성질을 가진 탄수화물의 앞 글자를 따 FODMAP이라 부릅니다.

 



이 용어는 호주 Monash 대학의 소화기학부에서 만든 것이며, Monash 대학의 소화기학부는 과민성대장증후군(IBS) 연구로 유명합니다. 

 

과민성대장증후군(IBS)이란 말 그대로 대장이 과민해 있는 상태의 질병이며 그 원인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일반인에게 문제가 없는 음식의 섭취가 IBS 환자에게는 복통, 설사, 변비, 가스참 등의 증상을 일으킵니다.

 

그 중에서도 포드맵이 많이 함유된 음식을 섭취할수록 이런 증상들이 악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4가지 포드맵에 속한 당들 중에서도 특정 당들이 IBS 환자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위 표에 IBS환자가 피해야 하는 당들을 빨강색으로 표시해 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같은 단당류라도 포도당을 많이 함유한 포도의 섭취는 IBS 증상을 악화시키지 않지만 과당을 많이 함유한 사과의 섭취는 증상을 악화시킵니다. 


이 당들은 발효성이기 때문에 소화과정에서 대장 속 박테리아들에 의한 발효를 거칩니다.


발효 과정에서 세균은 포드맵을 에너지원으로 이용하고 부산물로 가스를 내놓는데 이 가스는 장을 자극합니다.


또한 포드맵은 대장으로 수분을 끌어들여 복통을 일으킵니다.

 

과민성대장증후군을 앓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포드맵이 많이 함유된 식품을 섭취해도 큰 불편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상인도 콩이나 고구마 등의 식품을 많이 먹으면 가스가 많이 찬다고 하는데 이는 이 식품들이 포드맵을 많이 함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IBS환자의 경우 소량의 포드맵 섭취로도 증상이 악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프락토올리고당(포드맵의 하나)을 많이 함유한 밀가루로 만든 빵은 본래 IBS 환자가 피해야할 음식입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방식으로 장기간 발효시켜 만든 사워도우 빵의 경우 발효과정에서 포드맵이 많이 줄어들게 됩니다.


포드맵은 탄수화물이므로 발효 과정에서 이스트의 먹이로 소모되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식품의 포드맵 정보를 제공하는 Monash 대학의 FODMAP 어플에서 가져온 정보입니다.

 

 

 

 

상업용 이스트로 발효시켜 만든 일반 흰밀가루 빵과 통밀빵은 포드맵을 다량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IBS환자가 피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반면 천연효모를 사용해서 전통 방식으로 구운 사워도우 빵은 흰밀이든, 통밀이든, 스펠트 밀이든 포드맵 함량이 낮습니다.

 

특히 스펠트 밀은 품종의 특성상 포드맵이 일반밀 보다 낮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밀가루의 종류 포스트를 참고하세요!

(밀가루의 종류: https://yuhny.tistory.com/32?category=776655)

 

사워도우 빵의 포드맵은 발효과정에서 많이 줄어들지만 그 양이 0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민성대장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람은 사워도우 빵이든 일반 빵이든 적게 먹는 것이 좋지만 먹지 않을 수 없다면 집에서 장시간 저온 발효시킨 사워도우 빵을 구워 드시기를 추천드립니다.  

 

4명의 IBS환자 중 3명이 저포드맵 식이요법 실행 후 증상이 호전되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집에서 밀가루와 물로 천연효모 기르는 법을 배워보겠습니다.

 

빵을 한 번도 구워본 적인 없는 사람도 따라할 수 있도록 아주아주 꼼꼼하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모든 도구와 재료 또한 최소화 하려고 합니다.

 

필요한 것만 필요하다.’는 것이 저의 모토이니까요.

 

그럼, 이제 함께 빵의 세계로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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