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에 떨며 긴 밤을 보냈다. 때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든 밤이 찾아왔다. 나는 내게 왜 이런 어둠이 찾아왔는지 알지 못했지만 아직은 더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가끔은 영원히 이 어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 본 찬란한 새벽 빛을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빛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눈부신 새벽 빛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불안의 밤을 가르며 어둠에 묻혀있던 대지를 밝히는 순간을 황홀하게 맞이하려면 나는 더 이상 절망하고 있을 수 없다. 


오늘은 내가 이 세상에 나온 지 30년이 되는 날이다. 지구가 태양을 30바퀴 돌고 다시 같은 자리에 왔다. 나는 그동안 수 많은 새벽을 맞이했다. 수백 수천 번의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을 보았지만 나는 기쁘지 않았다. 나는 황홀하지 않았지만 새벽을 맞이했다. 내 앞에 얼마나 많은 새벽이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숨쉬는 한 더 이상 놓치지 않겠다. 30번째 생일에 쓰는 이 글에서 나는 다짐한다. 앞으로 3가지를 하겠다. 


첫째로 운전하는 직업을 갖겠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원치 않아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나는 혼자 일하는 편이 좋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 온전하다. 지금까지 어떤 일도 1년 이상 지속할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운전이 편하다. 차를 모는 일이 어느정도 적성에도 맞는 것 같고 나만의 공간에서 일할 수 있다. 직업으로써의 운전은 생각과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 가능하면 차를 모는 일을 할 것이고 근무 시간은 최소화할 것이다. 


둘째로 몸과 마음을 보살피겠다. 매일 명상과 운동할 시간을 갖겠다. 나는 아직 내 안에 불안과 우울을 뿌리뽑지 못했다. 여러 시도를 해 보았지고 이제 내가 가야할 길은 명상이라 믿고 있다. 이것이 가장 안전하고 근본적인 해결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뇌는 경험에 따라 구조를 바꾸는데, 이를 신경 가소성이라 부른다. 뇌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약을 먹어도 결국 다시 같은 구멍에 빠진다. 명상은 자기 자신을 믿는 일이다. 나는 나를 믿는다.


셋째로 나머지 모든 시간을 그림을 그리고 블로그를 하는 데 쓰겠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에서 주어진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럴 수 있다면 나도 그 길을 가겠지만 나는 다른 길을 가야한다. 누군가는 불평하지 말고 남들 다 하니까 그냥 하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거의 죽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미 충분히 노력을 해 봤으니, 남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은 없다. 나의 일을 할 때 더 즐겁고 행복한 것을 물론이고 내 능력이 제대로 발휘된다. 온전한 나로서 해야할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이 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에는 이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 내 손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3년 뒤, 5년 뒤, 10년 뒤를 생각하면 지금 이 일을 해야 한다. 더디더라도 5년 뒤를 생각하면 해야한다. 돈을 벌 수단은 결국에는 이 일이 되어야 한다. 나는 자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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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을 받을 때 나는

“글쎄요… 일단 뭐라도 해서 돈을 좀 모으려 고요.”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은 거지 같은 대답이다.

진짜 대답은 “사람이 없는 예쁜 모래사장이 있는 바닷가에 땅을 살 겁니다. 


그곳에 통나무 집을 짓고 가능한 자급자족하며 살 겁니다. 


그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활을 쏘고 농사를 짓고 명상을 하며 살고 싶어요. 


이 4가지는 저의 일생에 거쳐서 숨이 붙어있는 한 하려고 해요.


각 분야를 깊이 실험하고 연구해서 저만의 정립된 체계를 만들어 보려고 해요. 


예술과 자연 외에 제가 관심 있는 게 이 세상에는 딱히 없거든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바란다면, 그 여정을 함께할 동반자가 있다면 더 좋겠군요. 


하지만 혼자 여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때로는 외롭겠지만…


의미 없는 사람들 속에 둘려 쌓여 사는 건 더 외롭거든요.”이다. 

 

 


내가 이렇게 대답하지 않고 둘러대는 이유는 피곤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꿈에 대해 말할 때는 직업적인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나의 대답은 이목을 끈다.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관념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속내를 밝히지 않게 되었다.


이질감만 커질 뿐이다.


돈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돈을 구하는 과정도 수단을 얻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수단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다음 질문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돈이 필요한 만큼 있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건가요?”

 

 


돈이 무한해도 하고 싶은 게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괜찮은 결론이다.


그냥 죽는 날까지 적당히 살아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원하는 것이 돈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은 상상 속에서 이루어야 한다. 


나에게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현실은 한계적이다.


그럼에도 내가 사는 현실 속에서 가능한 이상에 가깝게 가고자 노력할 뿐이다.

 

 

 

구체적인 대답을 얻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어느 날 빈 캔버스와 물감이 주어졌다.


캔버스에 이런 저런 밑그림을 그렸다 지우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수년에 걸쳐 큰 그림이 잡히기 시작하고 세부적인 것들을 채워 나간다.


어느 순간부터 그림의 전체적인 형태와 분위기는 거의 바뀌지 않는다.


이제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명확히 안다.


앞으로도 국소적인 변화가 있겠지만 이 정도면 그림은 완성되었다.


모든 것은 탐구를 하며 내면을 관찰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소비한 에너지와 시간은 상당했던 것 같다.


남들이 사회생활에 전념하는 동안 나는 이런 것들에 몰두했다. 


세상에서는 낭비한 시간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삶의 가치가 다른 사람들처럼 사회에 있었다면 나도 그런 인생을 살았겠지만,


내 삶의 가치는 그곳에 없다.


이것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내가 어디를 향해 가야하는지 알고 있다는 정도다.


정글 한 복판에 떨어지든, 사막 한 가운데 고립되든, 가야할 방향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루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오늘도, 내일도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색의 물감을 원하는 만큼 쓸 수 있다면, 캔버스에 무엇을 그릴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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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지금까지 겪었던 나를 괴롭히는 4가지 정신적 현상에 대해 쓰려고 한다.

현재 진행 중인 것도 있고 사라진 것도 있다.

이번에는 그 중에 하나인 강박적 사고와 그에 수반하는 감정에 대한 것이다.

강박적 사고가 사람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수렁에서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나의 경험을 밑그림 삼아 써놓았다.

이 정신 현상에 대한 의학적인 용어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감정의 늪이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생각에서 시작되나 종국에 가서는 헤어나오기 힘든 감정으로 자리 잡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문제를 명확히 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마음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이다.

그럴 경우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강박적 사고로 고통받는 환자를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나 상담가가 이 글을 읽는다면 환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감정의 늪


이 현상은 두 개 이상의 선택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유발된다.

보통은 두 개 중에 고민하는 경우가 많았다.

둘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유는 둘다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둘 다 맘에 안 들거나 하나가 오로지 단점만 있다면 선택에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두 개가 비슷하게 좋은 경우다.

이 경우 논리적인 해결책은 둘 다 갖거나, 반드시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과감히 하나를 버리는 것이다.

먼저, 전자는 나에게 문제가 된다.

하나만 선택하고자 하는 나의 극단적인 성향 때문이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궁극적인 하나를 찾는다.

“필요한 거 하나만 있으면 된다.”가 나의 가치관 이었다.

비슷한 선택지 중에서도 결국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과감히 버릴 수 있느냐?

그것도 나에게는 어렵다.

두 개를 놓고 고민하는 상황 자체가 완벽한 하나가 없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기 때문에 선택의 문턱을 넘어도 첫 번째 이유에 다시 발목이 잡힌다.

즉, 집착적인 성향 때문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온전한 선택이 아니기 때문에 회의가 찾아온다.

선택을 해도 문제이고 안 해도 문제인 혼돈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이 궁지에 빠지는 과정은 이렇다.

고민이 시작되면 둘 중 하나를 고르기 위해 두 선택지를 저울질 한다.

논리적으로 둘의 득실을 비교한다.

그 과정에서 이쪽으로 기울었다가 저쪽으로 기울었다가 갈팡질팡 한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천 번도 넘게 강물을 건너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어찌되었든 하나를 택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내 생각에 그나마 나은 하나를 고르게 된다.

그러면 이제 생각의 고뇌가 끝나는가?

이상적이지 않을 뿐 둘 중에 나에게 현실적으로 더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니 이제 선택에서 자유로운 것인가?

불행히도 이 정도가 되면 이미 늦었다.

생각에 관성이 생겨서 생각을 멈출 수가 없게 된다.

내릴 수 없는 시소에 탄 상황이 된다.

머리속에서는 이 선택이 정말 옳은 것이었는지 의문을 던지고 둘을 비교하던 그 장소로 다시 나를 데려다 놓는다.

생각을 번복해서 다른 하나를 선택한다 해도 여전히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절벽으로 내달리는 미친 말 위에 탄 것을 알지만 내릴 수 없다.

빠져나오려 발버둥칠수록 생각의 늪에 깊이 빠진다.

한 가지 문제가 더 있다.

단지 생각이 반복되는 것이라면 에너지가 소모될 뿐이다.

생각은 감정을 동반한다.

맑은 여름 하늘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처음 두 선택지를 비교할 때의 감정은 ‘들뜬 느낌’에 가깝다.

둘 사이를 셀 수 없이 오락가락하는 강박 속에서 감정은 ‘혼란’으로 바뀐다.

강을 건너면 떠난 자리가 생각나고 다시 돌아오면 건너 자리가 그리운 상황이 반복되니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혼란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부터는 해당되는 생각을 할 때마다 혼란이 같이 올라온다.

비교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으니 매번 혼란의 감정도 덤으로 받아야 한다.

생각과 감정은 계속 중첩이 되어 되풀이 할수록 그 세기가 강해진다.

종국에는 자아가 분열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상황에서도 생각은 자살기계처럼 계속 돌아간다.

한 생각에 사로잡힌 대가는 이렇다.

 


이 괴로움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다음을 생각해봐야 한다.

뿌리를 쫓아 내려다가 보면 미니멀리즘의 본질에 닿게 된다.

그 시작은 완벽한 하나를 소유하고자 하는 한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궁극적으로 필요한 한 가지만 소유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인가?

그것은 가능한 상태인 것인가?

필요한 하나의 궁극을 가졌다는 것은 누가 아는가?

내면을 잘 관찰해보면 그 판단의 기준은 감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판단은 이성이 하지만 필요의 욕구를 일으키는 것은 감정이다.

원하고 바라고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감정이다.

밥을 먹을 때 밥그릇 하나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좋다.

숟가락은 어떤가? 반드시 필요한가?

손으로 먹으면 되지 않는가?

식사할 때 숟가락을 쓴다면 정말 궁극적으로 필요한 하나만 추구한다고 할 수 있는가?

궁극적인 하나에 대한 필요의 경계는 누가 정하는가?

감정의 잣대로 정해진다.

감정은 변덕스럽다.

감정의 변덕으로는 명확한 경계를 만들 수 없다.

어제는 숟가락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고 오늘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감정이 진짜인가?

둘 모두 진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선택 사이에서 뚜렷한 경계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미니멀리즘은 주관적인 것이다.

절대적인 미니멀리즘은 없다.

더 나아가면 소위 미니멀리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최소를 추구한다면 그 종착지는 어떤 것도 없는 무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 외의 상태는 엄밀히 말하면 최소의 상태가 아니다.

무의 상태가 아닌 최소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모순의 수렁에 빠뜨리는 일이다.

원하는 감정이 크지 않은 사람에게도 선택은 여전히 어려운 고민일 것이다.

하지만 괴롭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감정이 강한 사람이다.

꽃 향기에 나는 발길을 멈출 수 밖에 없다.

꽃 향기 따위가 나에게 일으키는 감정의 요동은 너무나 강하다.

나의 성향으로 인해 이 괴로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와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비슷한 아픔을 겪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이 나락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에 대해 쓰려고 한다.

수도 없이 같은 구멍에 빠지다 보니 요령이 생겨 현재는 수렁에 잘 빠지지 않게 되었다.

낌새가 이상하면 내가 즉시 발을 빼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빠져도 전보다는 쉽게 나온다.

하지만 나의 극단적인 기질로 인해 언제라도 다시 빠질 수 있으며 의식적으로 정신의 고삐를 잡지 않으면 아주 깊이 빠질 것이다.

구덩이에 빠졌을 때, 알아야 할 것과 해야할 것이 있다.

알아야 할 것은 ‘궁극적이고 완벽한 하나를 가진 절대적인 상태는 처음부터 불가능 하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내 바람대로 만들었다면 이런 모양새는 아닐 것이다.

검은 예리하지만 부드러움이 없다.

솜은 부드럽지만 예리함은 없다.

검의 예리함과 솜의 부드러움을 모두 갖는 이상적인 무엇인가는 존재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하나만 가지려면 둘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하는데, 그 선택의 기준은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베는 상황에서는 검이 필요하고 또 다른 의미의 베는 상황에서는 솜이 필요하다.

감정에 따라 오늘은 검의 예리함을, 내일은 솜의 부드러움을 원할 것이다.

둘 사에서 고민하는 상황이 둘 모두를 필요로 하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선택에 대한 고민은 무의미한 것이다.

애초에 완벽한 하나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완벽하다는 기준도 가변적이다.

‘완벽한 하나’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며 생각의 늪으로 빠지는 길이다.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그 생각에 대한 답이 애초에 없다는 것을 먼저 인지한다.

어차피 모든 선택이 불완전 하니, 어떤 선택을 하든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을 선택하든, 저것을 선택하든, 선택을 하든, 안 하든 어차피 완벽한 것은 없다.

이 세상 자체가 내게는 불완전한데 어쩌겠는가?

내 마음 또한 불변하는 것이 아닌데 어쩌겠는가?

불완전한 세상과 내 자신을 인정할 수 없다면 죽는 수밖에 없다.

그게 아니라면 적당한 것을 선택하고 살아가야 한다.

바보처럼 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불행하게 사는 것이다.

그것도 안 된다면 혼란의 감정이 사라질 때까지 선택을 보류한다.

미쳐있는 상태에서 온전한 분별력이 있을 리가 없다.

 

그 다음 해야할 일은 주의를 돌리는 것이다.

뇌는 생각을 하고 느끼는 방향으로 계속 강화된다.

뇌 속의 해당 회로가 너무 강해졌으니 다시 약화시켜야 한다.

방법은 회로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뇌의 시냅스 회로는 사용하지 않으면 약해진다.

회로는 강화될수록 빠져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더 이상 그 방향으로 시냅스 회로를 강화하지 말아야 한다.

생각이 그쪽으로 빠질 때마다 가능한 빠르게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

말은 쉽지만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머리 속에서는 여기서 나가야겠다는 생각과 분석을 계속하면 분명 더 나은 답이 있을 것 같다는 강박이 계속해서 충돌한다.

그 속에서도 주위를 돌리기 위한 뭔가를 계속 해야한다.

파괴적이거나 자학적이지 않은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해야한다.

충격이 강할수록 빠져나오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우연히 병원에 갔다가 말기 암 진단을 받아 3개월 뒤에 죽는다는 선고를 받는다면 강박에서 즉시 자유로워질 것이다.

강박이 아무리 심해도 생존에 대한 본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그 정도의 충격을 받기는 어렵기 때문에 즉시 빠져나오는 것은 힘들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록 조금씩 강박에서 멀어진다.

당분간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

바쁘게 몸을 움직이거나 사람들과 봉사를 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정신없이 머리 쓰는 일을 하거나 계속 명상을 한다.

생각이 새어나갈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모래 위에 파인 발자국이 파도에 씻겨 나가듯 나를 옥죄던 강박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그런 길은 없다
아무리 어둔 길이라도
나 이전에
누군가는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고,
아무리 가파른 길이라도
나 이전에
누군가는 이 길을 통과했을 것이다.
아무도 걸어가 본 적이 없는
그런 길은 없다.
나의 어두운 시기가
비슷한 여행을 하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베드로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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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의 행복이 다른 것들 보다 중요한지 생각을 해보았다.


나를 위해 사는 것이, 나의 행복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생각을 해 볼 필요를 느꼈다.


이 선택이 단순히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감정적인 것이라 해도 내게는 큰 차이가 없겠지만 감정적 선택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라도 생각을 해봐야했다. 


모르면 모른다는 사실이라도 인정을 하고 싶었다.


물론 이것은 정신이 조금이라도 돌아오니까 부릴 수 있는 사치다. 


이 사치에 감사한다.

 

 

그렇게 생각을 쫓다 보니 답을 얻었다.


결론은 내가 이기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만 이기적은 아니었다.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이기적인 선택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행복을 택한 사람도, 타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한 사람도 모두 그렇게 하고 있었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택한 자신의 불행도 결국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에 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남의 행복을 짓밟았을 때 올 감정적 고통과 온갖 책임들을 피하기 위해 결국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한 것이다. 

 

돕지 않아서 아쉬운 것은 남이 아니라 자신이다.


인간의 모든 선택과 판단의 성질 자체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인데 모든 것이 부정하다면 어떤 것을 비난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러한 사실을 외면한 채 선행을 하며 자신이 이타적인 선택을 했다고 믿는 사람 보다 본래 이기적인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이 더 이타적이지 않을까라는 역설적인 생각도 들었다.

 

 

이기적인 것은 나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기적이기 때문에 이타적일 수 있는 것이다. 


이기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


그로 인해 타인의 소중함도 알게 된다.


자신의 목숨이 소중한 것을 알기 때문에 남의 목숨도 소중한 것을 안다.


자신의 물건이 소중한 것을 알기 때문에 남의 물건도 소중한 것을 안다.

 

이기적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남을 도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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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지났을까?


벼랑에서 벗어나려 몸부림 치던 그 순간에서.


곧 깨져 사라져 버릴 것 같던 그 날들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지금 아는 것은 내가 그 절망의 낭떠러지에서 많이 멀어졌다는 것이다.


여전히 덤불길을 걷고 있지만 벼랑길은 아니다.


아주 조금씩 짙은 고독과 불안들이 내게서 씻겨가고 있다.


이만큼이라도 온전한 정신으로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삶이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 지를 보려면 내가 요리를 하는지를 보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동안 뭔가를 할 의욕도 뭔가를 먹을 식욕도 없었다.


식욕이 완전히 돌아온 것 같다.


그러니 요리를 할 의욕도 생겼다.


누군가의 조바심 나게 하는 이야기들은 이제 듣지 않겠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땅을 밟고 별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됐다.


아직은 조금 더 가야 평지에 닿을 수 있다.


하지만 저 멀리 새벽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평지를 넘어 먼동이 트는 그곳에 가면 뭐가 있을까?


못 닿아도 좋다. 


옆에서 피어나는 진달래와 지저귀는 새들, 흐르는 물소리를 놓치지 않겠다.


그 속에서 그곳을 향해 계속 걷겠다.

 


 
앞으로 이 블로그에 내가 관심있는 몇가지를 정리하려고 한다.


이 세상에 나를 살아있게 해주는 것들이 몇가지 있다.


그것들을 정립해서 하나의 세계로 만드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그 밖에 하고 싶은 것도 딱히 없으니 어차피 살아가는 김에 감자 밭이라도 하나 일구려고 한다.


밭에서 나는 작물들은 나에게 살아갈 양분을 줄 것이다.


혹시 감자를 알아보는 누군가가 우연히 그 옆을 지나간다면 그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정도는 하는 것이 내 존재에 대한 보답을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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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을 하면서 뇌가 작용하는 과정을 관찰하다 보니 내가 무의식의 노예라는 생각이 든다.


머리로는 이미 쓸데가 없어서 쓰레기통에 넣어버린 생각을 무의식은 계속 쓰레기통을 들쑤시고 찾아내어 다시 내 앞에 가져다 놓는다. 


분명 방금 버린 생각인데 정신을 차려보면 바로 눈 앞에 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쓰레기통에 넣지만 어느새 또 나와있다.


쓰레기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어느때는 같은 쓰레기를 100번도 넘게 다시 보는 것 같다.


어처구니가 없다.


이 경험으로 지금 내가 얻은 교훈은 이것이다.



첫째, 가능하면 자극(스트레스)을 피할 것

 

일단 어떤 자극이 뇌에 각인이 되면 아무리 생각을 고쳐 먹어도 한동안 무의식의 관성을 이겨낼 수 없는 것 같다.

 

최초의 자극이 셀수록 관성도 세지고 그 습관에서 벗어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또한 자극의 세기는 주관적인 것 같다.

 

사람마다 정신적으로 민감하고 취약한 부분이 다를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판단하여 충격이 될만한 상황을 피해야 한다.

 

자기 자신이 불완전 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때로는 문제를 덮어둘 필요가 있다.

 

특히, 정신적으로 불안정할 때는 자극적인 상황을 최대한 피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도 자신에게 맞는 환경에 살아야 하지 않나 싶다.

 

가지고 태어난 것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본성을 완전히 바꾸기는 힘들 것이다. 


민물고기가 바다에 빠진다면 평생을 별난 자신을 자책하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간단히 그 물고기를 강으로 던져주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삶은 때로는 우리에게 불가피한 일을 던져준다. 

 

그 속에서 나는 최대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상황을 피할 것이다. 

 

모두가 겁쟁이라고 비겁하다고 비난해도 어쩔 수 없다. 

 

강으로 갈 수 있다면 애써 소금물에 적응하려 괴로워할 필요가 무엇일까. 

 

남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 한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믿는다. 

 


둘째, 이미 구덩이에 빠졌다면 나오는 데 시간이 걸린 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기에는 소모적인 생각과 하루 종일 씨름을 하는 자신을 보면 처음에는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자신이 한심하고 쓸모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그럴 때 이 생각에서 즉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인정하지 않으면 자책을 하게 된다. 

 

그 대신에 생각이 반복될 때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알아차리고 “또 왔구나 임마. 나를 좋아도 하는구나. 언제까지 나를 쫓아다니나 보자.” 라고 생각하자 훨씬 견딜 만 했다. 

 

지금 나를 죽일 것 같이 괴롭히는 이 일이 시간이 지나면 별 일이 아니게 될 것이 뻔하다. 

 

그 사실을 알고 다만 호흡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 새인가 강박이 사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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