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지금까지 겪었던 나를 괴롭히는 4가지 정신적 현상에 대해 쓰려고 한다.

현재 진행 중인 것도 있고 사라진 것도 있다.

이번에는 그 중에 하나인 강박적 사고와 그에 수반하는 감정에 대한 것이다.

강박적 사고가 사람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수렁에서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나의 경험을 밑그림 삼아 써놓았다.

이 정신 현상에 대한 의학적인 용어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감정의 늪이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생각에서 시작되나 종국에 가서는 헤어나오기 힘든 감정으로 자리 잡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문제를 명확히 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마음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이다.

그럴 경우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강박적 사고로 고통받는 환자를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나 상담가가 이 글을 읽는다면 환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감정의 늪


이 현상은 두 개 이상의 선택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유발된다.

보통은 두 개 중에 고민하는 경우가 많았다.

둘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유는 둘다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둘 다 맘에 안 들거나 하나가 오로지 단점만 있다면 선택에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두 개가 비슷하게 좋은 경우다.

이 경우 논리적인 해결책은 둘 다 갖거나, 반드시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과감히 하나를 버리는 것이다.

먼저, 전자는 나에게 문제가 된다.

하나만 선택하고자 하는 나의 극단적인 성향 때문이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궁극적인 하나를 찾는다.

“필요한 거 하나만 있으면 된다.”가 나의 가치관 이었다.

비슷한 선택지 중에서도 결국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과감히 버릴 수 있느냐?

그것도 나에게는 어렵다.

두 개를 놓고 고민하는 상황 자체가 완벽한 하나가 없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기 때문에 선택의 문턱을 넘어도 첫 번째 이유에 다시 발목이 잡힌다.

즉, 집착적인 성향 때문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온전한 선택이 아니기 때문에 회의가 찾아온다.

선택을 해도 문제이고 안 해도 문제인 혼돈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이 궁지에 빠지는 과정은 이렇다.

고민이 시작되면 둘 중 하나를 고르기 위해 두 선택지를 저울질 한다.

논리적으로 둘의 득실을 비교한다.

그 과정에서 이쪽으로 기울었다가 저쪽으로 기울었다가 갈팡질팡 한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천 번도 넘게 강물을 건너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어찌되었든 하나를 택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내 생각에 그나마 나은 하나를 고르게 된다.

그러면 이제 생각의 고뇌가 끝나는가?

이상적이지 않을 뿐 둘 중에 나에게 현실적으로 더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니 이제 선택에서 자유로운 것인가?

불행히도 이 정도가 되면 이미 늦었다.

생각에 관성이 생겨서 생각을 멈출 수가 없게 된다.

내릴 수 없는 시소에 탄 상황이 된다.

머리속에서는 이 선택이 정말 옳은 것이었는지 의문을 던지고 둘을 비교하던 그 장소로 다시 나를 데려다 놓는다.

생각을 번복해서 다른 하나를 선택한다 해도 여전히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절벽으로 내달리는 미친 말 위에 탄 것을 알지만 내릴 수 없다.

빠져나오려 발버둥칠수록 생각의 늪에 깊이 빠진다.

한 가지 문제가 더 있다.

단지 생각이 반복되는 것이라면 에너지가 소모될 뿐이다.

생각은 감정을 동반한다.

맑은 여름 하늘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처음 두 선택지를 비교할 때의 감정은 ‘들뜬 느낌’에 가깝다.

둘 사이를 셀 수 없이 오락가락하는 강박 속에서 감정은 ‘혼란’으로 바뀐다.

강을 건너면 떠난 자리가 생각나고 다시 돌아오면 건너 자리가 그리운 상황이 반복되니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혼란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부터는 해당되는 생각을 할 때마다 혼란이 같이 올라온다.

비교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으니 매번 혼란의 감정도 덤으로 받아야 한다.

생각과 감정은 계속 중첩이 되어 되풀이 할수록 그 세기가 강해진다.

종국에는 자아가 분열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상황에서도 생각은 자살기계처럼 계속 돌아간다.

한 생각에 사로잡힌 대가는 이렇다.

 


이 괴로움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다음을 생각해봐야 한다.

뿌리를 쫓아 내려다가 보면 미니멀리즘의 본질에 닿게 된다.

그 시작은 완벽한 하나를 소유하고자 하는 한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궁극적으로 필요한 한 가지만 소유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인가?

그것은 가능한 상태인 것인가?

필요한 하나의 궁극을 가졌다는 것은 누가 아는가?

내면을 잘 관찰해보면 그 판단의 기준은 감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판단은 이성이 하지만 필요의 욕구를 일으키는 것은 감정이다.

원하고 바라고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감정이다.

밥을 먹을 때 밥그릇 하나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좋다.

숟가락은 어떤가? 반드시 필요한가?

손으로 먹으면 되지 않는가?

식사할 때 숟가락을 쓴다면 정말 궁극적으로 필요한 하나만 추구한다고 할 수 있는가?

궁극적인 하나에 대한 필요의 경계는 누가 정하는가?

감정의 잣대로 정해진다.

감정은 변덕스럽다.

감정의 변덕으로는 명확한 경계를 만들 수 없다.

어제는 숟가락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고 오늘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감정이 진짜인가?

둘 모두 진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선택 사이에서 뚜렷한 경계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미니멀리즘은 주관적인 것이다.

절대적인 미니멀리즘은 없다.

더 나아가면 소위 미니멀리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최소를 추구한다면 그 종착지는 어떤 것도 없는 무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 외의 상태는 엄밀히 말하면 최소의 상태가 아니다.

무의 상태가 아닌 최소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모순의 수렁에 빠뜨리는 일이다.

원하는 감정이 크지 않은 사람에게도 선택은 여전히 어려운 고민일 것이다.

하지만 괴롭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감정이 강한 사람이다.

꽃 향기에 나는 발길을 멈출 수 밖에 없다.

꽃 향기 따위가 나에게 일으키는 감정의 요동은 너무나 강하다.

나의 성향으로 인해 이 괴로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와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비슷한 아픔을 겪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이 나락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에 대해 쓰려고 한다.

수도 없이 같은 구멍에 빠지다 보니 요령이 생겨 현재는 수렁에 잘 빠지지 않게 되었다.

낌새가 이상하면 내가 즉시 발을 빼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빠져도 전보다는 쉽게 나온다.

하지만 나의 극단적인 기질로 인해 언제라도 다시 빠질 수 있으며 의식적으로 정신의 고삐를 잡지 않으면 아주 깊이 빠질 것이다.

구덩이에 빠졌을 때, 알아야 할 것과 해야할 것이 있다.

알아야 할 것은 ‘궁극적이고 완벽한 하나를 가진 절대적인 상태는 처음부터 불가능 하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내 바람대로 만들었다면 이런 모양새는 아닐 것이다.

검은 예리하지만 부드러움이 없다.

솜은 부드럽지만 예리함은 없다.

검의 예리함과 솜의 부드러움을 모두 갖는 이상적인 무엇인가는 존재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하나만 가지려면 둘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하는데, 그 선택의 기준은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베는 상황에서는 검이 필요하고 또 다른 의미의 베는 상황에서는 솜이 필요하다.

감정에 따라 오늘은 검의 예리함을, 내일은 솜의 부드러움을 원할 것이다.

둘 사에서 고민하는 상황이 둘 모두를 필요로 하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선택에 대한 고민은 무의미한 것이다.

애초에 완벽한 하나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완벽하다는 기준도 가변적이다.

‘완벽한 하나’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며 생각의 늪으로 빠지는 길이다.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그 생각에 대한 답이 애초에 없다는 것을 먼저 인지한다.

어차피 모든 선택이 불완전 하니, 어떤 선택을 하든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을 선택하든, 저것을 선택하든, 선택을 하든, 안 하든 어차피 완벽한 것은 없다.

이 세상 자체가 내게는 불완전한데 어쩌겠는가?

내 마음 또한 불변하는 것이 아닌데 어쩌겠는가?

불완전한 세상과 내 자신을 인정할 수 없다면 죽는 수밖에 없다.

그게 아니라면 적당한 것을 선택하고 살아가야 한다.

바보처럼 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불행하게 사는 것이다.

그것도 안 된다면 혼란의 감정이 사라질 때까지 선택을 보류한다.

미쳐있는 상태에서 온전한 분별력이 있을 리가 없다.

 

그 다음 해야할 일은 주의를 돌리는 것이다.

뇌는 생각을 하고 느끼는 방향으로 계속 강화된다.

뇌 속의 해당 회로가 너무 강해졌으니 다시 약화시켜야 한다.

방법은 회로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뇌의 시냅스 회로는 사용하지 않으면 약해진다.

회로는 강화될수록 빠져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더 이상 그 방향으로 시냅스 회로를 강화하지 말아야 한다.

생각이 그쪽으로 빠질 때마다 가능한 빠르게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

말은 쉽지만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머리 속에서는 여기서 나가야겠다는 생각과 분석을 계속하면 분명 더 나은 답이 있을 것 같다는 강박이 계속해서 충돌한다.

그 속에서도 주위를 돌리기 위한 뭔가를 계속 해야한다.

파괴적이거나 자학적이지 않은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해야한다.

충격이 강할수록 빠져나오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우연히 병원에 갔다가 말기 암 진단을 받아 3개월 뒤에 죽는다는 선고를 받는다면 강박에서 즉시 자유로워질 것이다.

강박이 아무리 심해도 생존에 대한 본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그 정도의 충격을 받기는 어렵기 때문에 즉시 빠져나오는 것은 힘들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록 조금씩 강박에서 멀어진다.

당분간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

바쁘게 몸을 움직이거나 사람들과 봉사를 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정신없이 머리 쓰는 일을 하거나 계속 명상을 한다.

생각이 새어나갈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모래 위에 파인 발자국이 파도에 씻겨 나가듯 나를 옥죄던 강박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그런 길은 없다
아무리 어둔 길이라도
나 이전에
누군가는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고,
아무리 가파른 길이라도
나 이전에
누군가는 이 길을 통과했을 것이다.
아무도 걸어가 본 적이 없는
그런 길은 없다.
나의 어두운 시기가
비슷한 여행을 하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베드로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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