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학에는 결정적 시기 가설(critical period hypothesis)이라는 것이 있다. 

 

결정적 시기는 생명체의 발달 단계에서 신경계가 외부 자극에 특히 민감한 기간을 가리킨다. 

 

모국어 습득에 있어서는 5세에서 사춘기 까지가 결정적 시기라고 여겨진다. 

 

이 기간에 모국어에 대한 적절한 자극(교육)을 받지 못하면 그 이후에 아무리 강한 자극을 주어도 완전한 언어구사력을 습득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아주 어렸을 때 야생에 고립되어 동물들에 의해 키워진 아이들(feral children)의 예를 보면 대부분이 인간의 사회로 복귀한 후에도 평생 동안 언어습득에 어려움을 보이며 동물의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A Lion Attacking a Stag, George Stubbs ,1765-1766

 

이 이론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여기서 언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 이론의 진위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언어가 인간에게, 그리고 나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 이다.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근본적인 차이를 이성이라고 한다. 

 

이성이란 개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다. 개념이란 대상을 구체화한 것이다. 

 

구체화란 추상화와 반대되는 것으로 형태를 갖게 하여 지각할 수 있게 한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대상이든 보이지 않는 대상이든 머릿속에서 구체화할 수 있다. 

 

그 구체화는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어떠한 대상을 머릿속에서 언어라는 형태로 구체화하여 생각하는 능력이 이성이며 구체화한 여러 대상들의 관계를 따지는 것이 논리다. 

 

논리와 이성적인 사고는 모두 언어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언어라는 수단이 없는 동물은 대상을 구체화하여 저장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논리적인 사고에 한계가 있다. 

 

그들은 추상 속에 살고있다.

 

 

Composition-VII, Wassily Kandinsky, 1913


인간의 문명 자체가 언어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집이다. 

 

언어가 사회적인 측면에서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 같다. 

 

첫째는 논리적인 사고로 체계를 새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이고 나머지는 후대에 지식을 전하는 전령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논리를 바탕으로 체계적인 이론과 제도를 만들고 그 체계를 한 세대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구전으로 전하여 또는 글로 기록하여 다음 세대로 전수하고 이어받아 발전시키게 한다. 

 

우리는 그것을 문명이라 부른다.

 

 

Seaport with the Embarkation of the Queen of Sheba, Claude, 1648

나는 언젠가 사람들로 가득한 이 도시를 벗어나 혼자 살아가려고 한다. 

 

여태껏 한 번도 이곳이 내가 있을 곳이라 생각한 적이 없다. 

 

인간들의 사회는 지금까지 나에게 상실과 실망, 이질감을 주었다. 

 

그곳에서 시작된 불안이 이제는 습관처럼 하나의 감정으로 자리잡았다. 

 

그들이 내게 가르쳐 준 관습과 형식, 방식, 태도는 마지막 한 톨까지 모조리 나의 세계에서 털어 버려야 불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야만 내가 온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정말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사람들은 지금까지 나를 키워주고, 말하고 쓰는 법을 가르쳐 주고, 숟가락과 젓가락 쓰는 법을 알려주고, 과학과 역사를 가르쳐 주고, 컴퓨터 쓰는 법과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 모든 것들을 내놓고 나면 나에게서 무엇이 남는가? 

 

여태 그들의 조력 없이 오직 나의 힘으로 해낸 것이 무엇인가? 

 

무엇보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득한 세월 동안 발전시켜 온 인간 고유의 특성인 언어를 나에게 주었다. 

 

그래서 나는 한 인간이 되었다. 

 

나는 그들이 준 언어로 생각하고 분별한다. 

 

그들의 언어로 나의 문명이라 할 수 있는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와 나의 예술에서 그들의 소산인 언어를 뿌리뽑을 수 있는가? 

 

머릿속에 일어나는 사소한 한 생각에서 조차 그들의 소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내가 만일 문명에서 고립되어 침팬지들에 의해 길러졌다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인지와 사고를 소유하고 있을까? 

 

침팬지의 아이인 나는 과연 노을 그림을 보고 지금처럼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을까? 

 

천둥이 치고 폭풍우가 몰려오는 밤에는 여전히 비장함을 느낄 것인가? 

 

언어와 감정은 다른 것이니 여전히 그렇게 느낄 것인가? 

 

아닐 것이다. 

 

섬세한 감정들 또한 문화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을 것이다. 

 

침패지는 노을 그림의 가치를 모를 것이다. 그들에게 노을 그림은 새 똥이 묻은 나뭇잎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A Country Home, Frederic Edwin Church, 1854

 

인간을 규정하는 자질의 바탕이 언어에 있기 때문에 언어를 나에게서 뿌리뽑지 못한다면 결국 나는 인간들에게 종속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나라는 존재의 정신 작용을 이루고 있는 것이 언어이므로 언어를 나에게서 뿌리뽑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20년 동안 부모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자란 아이가 여태껏 필요한 모든 것들은 자력으로 익힌 것이며 이제 혼자 살 수 있으니 더 이상 인생에 참견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배은망덕하고 자기의 분수를 모르는 말일 것이다.

 

 

 


지금까지 인간과 언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이유는 나의 예술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한계성을 인정하기 위해서였다. 

 

나만의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처음으로 할 일은 내가 인정할 수 없는 사람들과 그들이 이루고 있는 사회에서 얻은 것들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그들에게 받은 것이고 어디까지가 온전히 내가 터득한 것인지 생각을 해보니 그 뿌리가 언어에 있었고, 언어는 나와 불가분한 요소라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따라서 고립되어 혼자 예술을 창조한다 하여도 인간들을 내 예술에서 근절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나는 그 사실을 것을 인정한다. 

 

 

 


덧붙여, 사회를 역행하는 나의 성향 또한 사회적 경험들로부터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결국 나라는 존재 전부가 사회적 산물 그 자체인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내가 취할 수 있는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아집을 버리고 내 예술에 그들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일까? 

 

하지만 이론과 현실이 항상 타협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의식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든 무의식 속에 박힌 내 성향은 변하기 매우 힘든 것이다. 

 

그들이 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을 그릴 수는 없다. 

 

나의 성향을 거스르는 것은 매우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치 않는 것도 원수의 것이고 원하는 것도 원수의 것이라면 선택은 명확해 진다.

 

 

 Wheatfield with crows, Vincent van Gogh, 1890

기질상 나의 지향성은 함께 있음을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성에 반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함께 있음에서 오는 불안으로부터 홀로 온전하기를 바라는 누군가가 있다면 내 말을 이해할 지도 모르겠다. 

 

내가 예술에서 추구하는 것은 지속가능성과, 자급자족이다. 

 

이 두 가지 요건은 인과관계에 있기 때문에 사실상 같은 의미로 봐야 한다.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자급자족해야 하며, 자급자족하면 지속이 가능하다. 

 

여기서 말하는 자급자족이란 다른 인간을 제외한 나와 자연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부모가 있는 집에서 나와 독립한 채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자급자족의 의미와는 다르다. 

 

사회에서의 자급자족은 내 시각에서는 지속가능한 상태가 아니다. 

 

 

 


그 이유는 내가 인간의 속성을 ‘변화’로, 자연의 속성을 ‘순환’으로 보기 때문이다. 

 

인간은 알 수 없는 끝을 향해 정처 없이 나아가는 존재다. 

 

자연은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끊임없이 순환하는 세계다.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할 것 같은 지구도, 태양도 조금씩 변하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최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직진성은 자연의 것과는 비교 할 수 없이 거세다. 

 

끊임없이 표류하는 인간들에게 의지한 채 살아가는 삶의 형태가 나에게는 불안 요소가 된다. 

 

변화 자체를 내 세계에서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변화무쌍한 세계라도 전체를 아우르는 순환 체계가 있어야 한다. 

 

변화가 있는 세계는 흥미롭지만 불안을 내포하고 있으며 변화가 없는 세계는 안정적이지만 따분하다. 

 

이 두가지를 모두 내포한 개념이 순환이다. 

 

그래서 내 예술의 관찰 대상은 자연이며 나와 자연 사이에 다른 인간을 배제한다. 

 

 

상형문자

위쪽의 그림은 내가 임의로 만든 상형문자다.

 

사물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문자를 상형문자라 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식적인 문명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대부분 이해할 것이다. 

관동별곡, 정철, 1580


위의 글은 1580년 강원도 관찰사에 부임한 정철이라는 사람이 강원도 여행을 하고 느낀 자신의 소감을 노래한 관동별곡이라는 가사의 일부다.

 

440년 전에 쓰인 글을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바꿔 말하면 지금 나의 이 글을 500년 후의 한국인들은 해석 없이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해석을 통해 이해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원문의 미묘한 어감과 말투를 온전히 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도 변하기 마련이다.

 

언어의 일시성 때문에 어느 시점이 되면 한 개인이 독자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즉, 언어는 어느 순간 자급자족할 수 없는 수단이 된다.

 

상형문자는 한 인간이 자연에서 얻는 보편적인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 들어간다.

 

하지만 관동별곡의 경우 해당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시대에서는 자연을 아무리 오랫동안 관찰한다 해도 혼자서는 이해할 수 없다.

 

지금 이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와 자연 이외에 변화하는 외부 세계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곳은 끝없이 쇄도하는, 언제 곤두박질칠지 모르는 세계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강원도의 절경을 글이 아닌 그림이나 사진 또는 음악으로 남겨놓았다면 수천년이 지나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누군가의 이해를 바란다는 말은 그 자체로 자급자족에 모순되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

 

나 이외의 누군가에게 기대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예술을 이해하는 대상을 나는 남이 아닌 나 자신으로 본다.

 

내가 사고로 기억을 잃은 채 냉동 인간이 되어 수 천, 수 만년 뒤에 깨어난다고 해도 상식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면 그 시대에서 내 그림을 보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기를 바란다.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Caspar David Friedrich, 1818

 

내 예술적 성향은 18세기 예술 사조인 낭만주의의 전형이다. 

 

낭만주의란 어떤 대상에서 낭만을 추구한다는 것인데, 낭만이란 감정의 극단이다. 

 

즉, 관찰의 대상에서 극단의 깊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낭만주의자에게 새벽은 단순히 불덩이가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때가 아니다. 

 

밤과 낮 사이를 가르며 새어 나오는 태양빛을 보며 어릿할 정도의 황홀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내 극적인 성향은 거기에서 온다고 본다. 

 

나는 가볍게 하지 않는다. 

 

한 발의 화살을 날리더라도 내 모든 것을 담아서 쏜다.

 

 

 


앞서 이야기한 내용과 종합해보면, 내 예술의 대상은 자연이며, 그 표현과 의미가 강렬하고 깊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자연관찰을 통해 독자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깊이가 있어야 한다. 

 

예술의 깊이에 대해서는 계속 생각하는 과정에 있으나 지금까지 이른 결론은 예술에서 깊이를 추구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라는 것이다. 

 

뻔하지 않은 것에서 오는 오묘함에 대한 깊이와 일반적인 대상의 깊은 탐구에서 오는 깊이다.

 

 

La Table Garnie, Henri Fantin-Latour, 1866

 

위 그림은 19세기 프랑스 화가인 헨리 팡탱 라투르가 그린 정물화다. 

 

그는 사실적인 꽃 정물화를 많이 그렸다. 

 

그의 그림이 보기에 난해하거나 오묘한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현실적인 묘사가 오히려 사진처럼 뻔하고 개성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그림에 깊이가 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흔하디 흔한 꽃과 과일이지만 화가 자신이 이 대상들로부터 깊은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면 평생을 이런 꽃 그림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화가는 원하는 구도를 찾기 위해 꽃과 과일을 이리저리 옮기며 얼마나 오랜 시간 탁자 주위를 맴돌았을까? 

 

얼마나 오랜 시간 붓을 들고 이젤 앞에 서 있었을까? 

 

완성된 그림을 보고 화가는 얼마나 깊은 행복을 느꼈을까?
 

 

Straw-trimmed vase sugar bowl and apples, Paul Cezanne, 1890-1893

 

이 그림은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폴세잔의 사과 정물화다. 

 

그의 그림이 미술사에서 가지고 있는 의의는 조금 과장해서 비유하자면 수렵 채집을 하던 인류가 ‘농사’짓는 법을 배운 뒤 삶의 행태가 바뀐 것과 같다. 

 

그는 현대 미술의 선두에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 그림을 처음 보고 유화를 막 배우기 시작한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의 습작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폴세잔의 정물화는 미술사적 가치에서 보자면 팡탱 라투르의 정물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전까지 회화에는 색, 형태, 원근 등의 깰 수 없는 암묵적 관습이 있었다. 

 

세잔은 수 세기 동안 지켜온 오랜 형식을 최초로 깬 사람이다. 

 

 

 


나는 미술사에 대해 공부를 한 후에도 이 그림이 여전히 순수하지 않으며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림 자체만으로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있어야 하는데, 이 그림의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그림 외적인 지식인 미술사에 대한 지식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다시 생각해보니, 이 그림은 지극히 순수하고 자연적이며 자급자족적이었다. 

 

이 그림이 가치 있는 이유는 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평범하고 뻔한 것에 실증이 느낀다. 

 

매일 똑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똑 같은 길을 걷고 똑같은 하늘을 보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시간에 잔다. 

 

이 생활은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따분하다. 

 

어느 날은 하늘을 보며 세찬 소나기가 쏟아지기를 바란다. 

 

어느 날은 매운 음식이 먹고 싶고 어느 날은 아직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가보고 싶은 법이다. 

 

세잔이라는 사람이 없었더라도 언젠가는 따분한 형식이 깨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흐름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과를 수 백, 수 천 번 그리다 보면 언젠가 한 번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물감을 덕지덕지 바르고 원근을 무시한 노란색 사과를 그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세잔의 사과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Still Life with Bible, Vincent Van Gogh, 1885

 

하지만 아무리 뻔하지 않은 것이 매력적이고 오묘하다 해도 앞서 설명한 이유 때문에 문자에는 한계가 있다. 

 

언어도 인간의 필요에 따라 자연적으로 발달하였지만 단순히 독특한 것을 넘어서 체계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시간이 무한하다해도 개인이 관찰과 경험으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내가 허용할 수 있는 문자는 상형문자 정도인데, 상형문자는 추상에 가까우므로 직관적인 이해는 쉬워도 고차원적이고 복잡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기에는 매우 제한적이다. 

 

만일 현대의 언어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자급자족을 만족하는 형태로 바꿔야 한다. 

 

예를 들어 한글을 사용하고자 한다면, 혼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에 대한 매뉴얼을 만들어 놓으면 자급자족할 수 있는 형태가 된다. 

 

그러면 언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더라도 매뉴얼로 당시의 예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매뉴얼은 물론 자급자족한 수단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하지만 한글의 쓰임 체계가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해당되는 모든 음소, 단어, 문법 체계를 단순한 상형문자 같은 수단으로 설명하는 것은 사실상 힘들다고 본다. 

 

 

 


어떤 예술을 추구하든, 내 모든 예술 작품에는 반드시 설명을 덧붙여 놓을 생각이다.

 

뻔한 팡탱 라투르의 정물화든, 난해한 세잔의 정물화든 어떤 점에서 감동이 있고 의미가 있는지 부연설명을 달아 놓을 것이다.

 

아무 의미가 없는 그림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말이라도 써 놓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예술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한글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고차원적인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현대 언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차원적인 깊이를 추구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성향으로 인해 문자 자체를 포기하기는 힘들 것 같다.


예술에 대한 체계가 정립되어 나가면서 새로운 방향이 생길 것으로 본다.

 

 

 


지금까지의 모든 내용을 정리하자면 나는 한 인간으로서 내가 독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인간의 특성을 규정하는 뿌리뽑을 수 없는 성질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 한계성을 인정한 위에서, 그들에게 받은 것을 이용해 나만의 것을 창조한다는 모순 위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그들의 것을 배제하고 나만의 예술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그러기 위한 조건은 예술이 나와 자연 사이에서 온전히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인 자급자족을 만족해야 하며, 극단적인 나의 성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감동을 줄 만큼 깊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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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앞에 바다가 있었다
내가 있는 해변가를 향해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갔다
나는 그 파도를 바라보았다
그 광경이 참으로 아름다워 한참 넋을 잃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내 의지로는 파도를 잡아둘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파도에게 왜 가야만 하는지 물었다
계속 머물 수 없느냐고 물었다
파도는 대답 없이 밀려갔고 다시 밀려왔다
떠나간 파도는 어김없이 돌아왔으나 다음에 오는 파도는 전과 같은 파도는 아니었다
이 파도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아득한 고독을 느꼈다
그리고는 고개를 떨구고 울었다
앞에 펼쳐지는 어쩔 수 없는 흐름들을 외면한 채 오랜 시간을 그렇게 있었다
돌연히 바다가 부는 세찬 바람을 맞고 고개를 들었다
나는 눈물을 닦고 옆에 있는 작은 돌을 집어 들어 바다를 향해 힘껏 던졌다
내 돌팔매질에도 무심한 파도는 여지없이 밀려오고 밀려갔다
나는 다시 돌멩이를 바다에 던졌다
이 까마득한 바다에 작은 돌멩이가 무슨 차이를 만들겠는가
출렁이는 바다를 결국 돌로 다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바다에 던진 작은 돌멩이는 우주를 떠도는 고독한 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 흔적은 내 자신에게는 그리고 어느 날 나와 비슷한 길을 걷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주 큰 차이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숨쉬는 한 계속 돌을 던질 것이다

 

The Reason

One day, I opened my eyes and saw the sea in front of me
The waves ebbed and flowed toward the beach where I was standing
I watched the waves
The sight was so beautiful that I absent-mindedly stood still for a while
Suddenly I realized the waves flowed in and out regardless of my intentions
I asked the waves why they had to go
I asked if they just could stay
Without an answer, the waves ebbed and flowed again
The wave that had left certainly returned, but technically the next wave was not the same as the former one
I was filled with loneliness at the fact that this approaching wave would never come again 
I hung my head and cried 
Turning away from all these incomprehensible circumstances I stayed that way for a long time
And then I turned my head to the high winds of the sea
I wiped my tears, picked a small stone from the ground and threw it hard to the sea
The careless waves promptly came and left beyond my stone
I threw another stone to the sea
What difference would a small stone make in this remote sea?
I will never fill this rolling sea with stones
I kept throwing stone because that doesn’t matter to me anymore
A man’s stone to the sea is nothing more than a floating star in the infinite universe. 
But it matters to me and somebody who may will walk the same path in the future
So I will throw stones as long as I brea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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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프 스케치
선 정리
기본색 입히기
전체적인 색 묘사
세부 묘사 및 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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